캐나다에서 엄마로 살아보며 느낀 점
세모를 처음 키울 때 끝도 없는 우울증세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아이와 나 자신이 싫었다. 푸석한 피부에 선크림조차 바를 사치가 허락되지 않던 시절. 질끈 올려 묶은 관리 안 된 머리, 가르마를 탈 여유조차 없던 그때. 내 기억 속 내 모습은 아이가 있는 엄마라는 것이 낯설고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아이와 24시간 붙어있는 생활이 누군가는 당연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당연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사회인 명단에서 누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알려주고 싶었는지 기어코 유모차를 끌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커피 향 가득한 별다방을 자주 가야 하루에 쓸모 있는 일 하나라도 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마저도 아이가 울면 따뜻한 커피를 급히 마셔버리고 허둥지둥 나와야 했던 날들이었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니 눈 깜짝할 새에 뛰어다녔다. 고작 10 몇 킬로 되는 아이를 어쩌지 못해 쫓아다니는 내 모습이 우스워졌다. 이런 아이를 데리고 예쁜 카페에 들어서면 No Kids Zone이라는 팻말에 몇 번 돌아가야 했었다. 인터넷 기사 댓글엔 맘충이라는, 개념 없는 부모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나쁘기보다 두려웠다. 누군가의 눈에 그렇게 보일까 봐. 아이가 있는 것만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판단될 수 있는 리그에 들어간 것만 같았다. 아이가 없다면 분명 눈길조차 받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 무개념 부모들이라고 말하는 댓글들을 오히려 열심히 읽었다. ‘잘 읽어두었다가 맘충 소리 개념 없는 부모 소리 안 들어야지. 나는 개념 있게 행동해야지.’ 다짐하곤 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아이의 모든 행동에 과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때쯤 둘째는 엄두도 못 냈던 이유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면 겨우 개념 없는 부모로 비칠지도 모를까 봐 전전긍긍하던 날들, 노 키즈존에 못 들어가던 날들을 탈출할 텐데, 또다시 아이를 낳음으로써 배척되고 소외되는, 움츠러드는 그 마음을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종종 캐나다에서 얼마나 아이들이 환영받고 ‘존중’ 받는지 놀라곤 한다. 우리가 캐나다에서 받은 환대는 모두 아이들 덕분이었다.
별다방에서 아이를 데리고 서 있는데 바리스타가 갑자기 아이 것도 만들어주겠다며 핫 초코 하나를 내려주었다. ”우린 주문 안 했는데? “ ”그냥 주는 거야. 아이도 마셔야지. 덜 뜨겁게 했어.”
세모와 네모가 공공장소에서 움직임이 커지거나 놀이의 텐션이 높아질 때면 난 주변 분들에게 사과를 한다.
ADHD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사과는 자동이고 습관이다. “I am so sorry." "No. They are just kids. Let them be." (그냥 아이들인 걸. 놔둬.)
캐나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낯선 사람들에게서 옅은 미소와 따뜻한 눈빛을 자주 받는다. 아이들이 진심으로 귀엽다는 눈빛이다.
“You have beautiful children."
기차 줄을 서 있는데 앞에 계신 분이 뒤를 돌아 나에게 갑자기 이런 말을 해주신다. 어느새 고작 몇 달 지냈는데도 나는 이 나라에서 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눈웃음과 미소를 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생겼다.
이곳에선 내가 아이가 있어서 호감을 사는 존재가 된다. 한국에 있을 땐 아이가 있는 내가 비호감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기차 여행을 떠나며 아이들과 긴 탑승줄에 서 있었다. “너희 왜 여기 서 있어? 저 쪽 가서 앉아 있어.”
뭔가 잘못된 건가? 긴장하며 줄에서 열외 됐다.
그러더니 우리를 안내한 곳은 “priority boarding"이라고 써진 우선탑승하는 곳이었다. 그곳엔 아이와 있는 부모들이 가득했다. 캐리어를 끌고 가는 세모에겐 승무원이 딱 잘라 말했다.
“You can't carry that. Someone will help you."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승무원이 나타나 세모가 끌던 캐리어를 끌어주셨다.
아이들을 향한 그들의 분주한 시선, 말 한마디에서 얼마나 아이들을 우선하여 바라보는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 살기 완벽한 나라라는 말은 아니다. 차별받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높은 물가에 한국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
노 키즈존도 예스 키즈존도 없는 나라에서 엄마로 살아보니 편안하다. 노 키즈존이 있어야 하는 이유의 중심엔 늘 부모의 태도가 논의대상이다. 어쨌든 아이를
낳은 나는 그 논의의 중심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을 느낀다.
이곳에선
두 아이의 손을 잡은 내 모습이
나를 당당하게 해 준다.
평가받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감만으로도
내 마음은 자유롭다.
참고로 이건 개인적인 시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