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왔다는 착각
아이가 ADHD를 진단받은 지 5년째다.
진단받고 난 후, ADHD의 원인이 뭔지 열심히 찾아보았다.
내가 임신 중에 뭔가 잘못한 게 있었나?
임신했을 때 학교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나?
(교직 경력 중 가장 힘든 반이었다.)
진통을 다 하고도 자연분만을 하지 못했던 이유일까?
아이를 재울 때 너무 많이 흔들었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책으로 끝나던 시기였다.
그런데 ADHD는 그냥 유전이라고 한다.
부모, 조부모에 흐르는 DNA.
양가감정이 들었다.
아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구나.
아, 근데 나 때문이구나.
그러다가도 내가 ADHD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성적도 늘 잘 나온 편이고, 공부에 의욕도 많고 친구관계도 나쁘지 않았으며 계획한 건 늘 해내고야 마는 악착같은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뭔가 ADHD와는 거리가 멀지 않나? 라며...
아이를 낳아 키운 지 만 10년이 되니, 내 기억 속 하나하나에 녹아있던, 세모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나의 ADHD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ADHD라고 생각하는 이유.
- 어릴 때부터 뭐든 요란하게 활동했던 바쁜 유년시절. 내 다리에는 멍과 딱지가 덕지덕지. 늘 그 딱지를 뜯고 또 뜯었던 기억이 난다. 자전 거 하나를 타도 꼭대기 계단에서 타고 내려가봐야 성이 풀린 과잉행동의 끝판왕.
-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때 친구를 사귀는 법을 도무지 몰라 용돈을 모으고 모아 친구가 좋아하는 것들을 문방구에서 싸다주며 친구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했다.
- 갑자기 친구 따라갔던 전 과목 종합 학원에서 '내가 기억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이해가 안 되면 무조건 외워버리면 성적이 잘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중학교 1학년, 전교 2등을 했다. 벼락치기를 하면 성적이 잘 나오던 시절이었다.
-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끝날 때까지 '과몰입'을 했다. 나는 그게 성적이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강박적으로 하나라도 틀리지 않게 외워 100점에 집착하던 시기였다.
- 대신, 열심히 학교 밖에서 내 강한 충동성을 해결했던 것 같다. 공부로 지루한 학교 생활을 바깥에서 해소했다.
- 고등학교가 되면서 학교 밖에서의 충동성은 더욱더 좋지 않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공부는 했다. 놀기 위해 했다.
- 대학교에 입학하니 인간관계에서의 충동성이 문제가 된 적이 많았다. 어느 날, 나를 차갑게 대하는 동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왜 나한테 그렇게 대하냐'라고 물으니, 내가 매번 말을 걸어놓고 자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듣지 않고 그냥 또 다른 사람한테 가버리는 게 반복되니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정말 몰랐다. 내가 대화할 때 얼마나 내 얘기만 하고 듣지 않는 사람이었는지.
- 휴대폰이 생기고 나서는 더욱더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충동적으로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해서 그 사람의 상황이나 대화의 의지는 상관하지 않고 내 할 말만 했던 행동들도 지금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온다.
- 20대를 돌아보면 충동성과 부주의함으로 인해 많은 실수들을 해왔다. 여느 ADHD인들이 겪는 미루기나 일적으로 실수하는 것들은 없는 편이었지만, 관계에서의 충동성이나 전환을 잘하지 못해서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 멀티태스킹하면서 우선순위를 모르고 잠을 대폭 줄여 3시간만 자고 많은 일들을 한 번에 해결하려 하는 것 때문에 이게 ADHD 때문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 충동적으로 이런저런 일을 벌여놓고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것들은 다 제쳐두고 그거 하나만 파는 것도 역시 그렇다.
내년에는 검사를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여전히 기분 조절이 안 될 때는 우울해진다. 강박적으로 푸시 알림을 다 확인해서 0으로 만들어 앱 위에 1이 뜨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는 나. 계획 대로 실행은 잘 하지만 우선순위를 모르고, 평소에 해야 할 세탁, 빨래, 요리, 아이들 챙기기 등에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남편이 세모에게 '대체 왜 그러냐'며 혼을 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본다. 세모가 평범한 기준을 벗어난 행동과 말을 할 때면 기억 속의 나의 마음이 보인다.
동생에게 틱틱 되는 건 '내가 더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만 장난스러운 말과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건 '지금 너무 지루하다'는 마음.
마음에 여유가 없이 친구도 나이 어린 동생도 다 이겨먹고 싶은 건 '잘하고 싶고 튀고 싶은' 마음.
부모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계속하는 건 '그래도 이 행동을 꼭 끝까지 해봐야겠다'는 고집스러운 마음.
만약 내가 ADHD가 맞다면,
나는 ADHD 때문에 더 많이 성취해 왔을 거라 생각하기도 한다.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고 강박적으로 끝까지 해낸 것들은 늘 나의 성취가 되었다. 평범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기에 평범하지 않은 이들을 더 존중하게 되었다.
일단, 검사부터.
5개월 뒤, 결과를 공유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