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에세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11월]
딱 1년 전. 이 문장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판타지 소설 속의 활자인 마냥 이 문장을 꿈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 피부를 스쳐 지나가곤 했다. 무엇보다 나는 스스로 몽상에 잠겨있길 자처했으니까. 그 접촉은 뜨겁기도 했고, 무덤덤하기도 했고, 때론 거친 생채기를 남기기도 했다. 좋아하면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사랑한다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단순함을 막연히 바라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내가 소설 속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1년 전의 난 ‘사랑’이란 말이 어색하다고 고백했다. 가만 돌아보니 불과 몇 달 전에도 ‘사랑’이 어색하다고 어느 글에서 읊었었고. 좋아하는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내가 머무는 곳의 울타리는 비좁고, 또 비좁았다. 나는 내가 다리 하나 맘 편히 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1년 동안 천천히 굳은 다리를 뻗었다. 예각이 둔각을 향해가는 동안 두 다리뼈가 부딪치고 무릎 아래는 처음 맞는 시린 공기에 얇게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내었다. 그 순간을 선연히 느끼던 나는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나는 여전히 그것을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기 위해선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나를 알아야 했다. 그런데 아직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아서 2021년의 마지막 30분을 좇는 내 시선이 움츠러들었다. 아,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내가 정말 멋진 답을 얻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해야 하는데. 그 순간 주변을 메우던 공기가 물먹은 안개 마냥 멎어버리고 만다. 아, 아직도 난 이미 주어진 틀에 억지로 나를 내보내려 하고 있구나. 단지 12월 31일이 1월 1일이 되는 것뿐인데. 꼭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데. 아직도 서툴다는 것이 1년이란 시간을 헛되이 살았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닌데. 그 순간의 나는 비로소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라는 꿈은 앞으로도, 어쩌면 평생 동안 꾸어도 될 소망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직 ‘사랑’을 어색해 해도 괜찮았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속도였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한 세상에서 가장 느린 망설임이었다. 내 삶의 미학은 그런 초상을 그려가고 있었고, 나는 이런 나를 좋아하고 싶다고 문득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2021년 12월 31일. 오후 11시 31분. 그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이 떠나가기 전에 어떤 문장을 읊어볼까. 사실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얼마나 억지로 애를 써서 살아왔는지 깨닫는 순간은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진작에 깨달아서 나름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나는 애를 쓰며 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다. 고쳐지지 않는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니까. 웃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서 입꼬리를 비죽 들어 올렸다. 그 순간의 나도 여전히 담담했다. 나는 여전히 이것을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나를 조금 더 분명히 이해했다는 것에 안도했다. 꽤 긴 시간 내가 살아가는 시간은 슬픔과 안도의 단위로 흘러갔다.
그 애매하고 우울한 감정들은 굳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히 구렁텅이에 빠져 눈물로 이끼나 키우고 있어도 되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이 무덤덤함을 지켜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모호한 경계선 위에 계속 앉아있었다. 나를 좋아하는 방법은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을 담담히 견뎌내면 무엇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시간들을 남들이 정한 한 달이란 기준에 맞춰 꾸준히 기록했다. 모순적이게도, “좋아하는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라는 문장으로.
아, 이제 정말 이 마지막 기록도 내 손에서 놓아줄 때가 점점 다가온다. 입술이 달싹이는 순간이다. 손가락 마디가 살며시 저려온다. 잠시 눈을 감고 몸에 들어간 긴장을 풀었다. 내일도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지금의 나 그대로일 테고, 그런 내가 여전히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그뿐이다. 가장 느린 망설임,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삶의 방식이라면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경직된 몸이지만 조금 더 나를 너그러이 안아 준 것 같다는 생각에 살며시 숨을 뱉었다. 자, 한 뼘 더 네가 살아가는 속도에 여백을 내어주자. 그게 옳은 것은 아닐지라도, 그게 가장 너다운 거니까.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너답게, 네가 비현실적인 소설처럼 그려왔던 ‘사랑’ 그 무엇에 다가가보자. 활자와 몽상에 가두어진 것을 입술과 시선으로 감각할 수 있는 그 순간을 향해.
그거면 돼. 그리고 분명 지난 시간은 그러기에 헛되지 않았어. 너는 그저 너대로 살아왔을 뿐이니까. 우리의 다음 목표는 그저 지금까지 견뎌온 시간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기억하며 앞을 바라보는 거야. 언젠가 좋아하는 일을 비로소 사랑하게 되는 순간까지는 그렇게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