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길은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다.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 1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 같달까? 방학 전날 밤 아직 한참 남은 탐구생활을 펼쳐놓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모든것은 순조로왔다. ’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난 그래도 XXX(현 영부인)는 좀 싫더라“
”그래도 갸는 남의 돈을 훔치진 않았어! 영부인 되기 전에 지가 똑똑해서 다 일궈놓은건데. XXX(전 영부인)이 그 미친년처럼 나랏돈 도둑질을 하진 않았지, 도둑년 미친년“
정치 얘기가 시작됐다. 잠이 확 달아났다.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댁은 말 그대로 태극기 부대의 심장과도 같은 곳. 24시간 채널 A를 틀어놓으시는 것은 물론, 보훈병원에서 4년여간 지내면서 더 심해졌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각종 유튜브 가짜 뉴스를 보셨고 지금도 보시고 있는 모양이다.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민주당에 오랜기간 꼬박꼬박 당비를 내고 있는 권리당원. 그야말로 진성당원이다. 본가에 갈 때마다 너 어디까지 견디나 보자 식의 포화와 같은 현 야당 욕을 그저 듣고 있어야 했다. 묵언수행 수준으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강도는 점점 세졌다.
지난 세월 참고, 참고 또 참고 참았던 남편은 그날 참지 못했다. 제발 좀 이상한 소리하는 유튜브같은거 보지 말고 제대로 알고 얘기하라며 짜증을 낸 것. 어머님은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반하는 꼴을 보지 못하시는 성정이다. 자식이든, 남편이든 그 누구든 말이다.
”미친 년놈들을 뭐 어떻게 말해 그럼? 어??“
”아니 엄마 그럼 엄마 아들은 지금 그렇게 욕하고 있는 민주당에 매달 돈 내고 있는 놈이라고요. 그럼 엄마 아들도 미친놈이에요?“
”그럼 그놈도 미친놈이지!!!!!“
”내가 미친놈이라고요? 하... 그래요 그럼 엄마 아들 미친놈이네“
삽시간에 차 안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남편이 어머님과 이 정도로 언성을 높인 걸 처음 봤기 때문에 나도 쫄았다. 스타리아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이어졌다.
남편은 어머님이 가짜 뉴스에 세뇌당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어머님은 똑똑하고 영리한 분이다. 선이 넘는 수위의 남탓을 하고 쌍욕을 하면 오히려 당신의 품위가 떨어진다는걸 모를 양반이 아니다. 남의 험담을 절대 하지 않고, 들은 말을 다른이에게 함부로 옮기지 않고, 지금껏 며느리인 내 앞에서 절대 무너진 모습 따윈 보여준 적 없는 분이다.
난 어머님이 현재의 답 없는 고통을 해소할 정당하고 쉬운 방법을 찾은거라 생각한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누구 탓을 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 욕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 내가 현생이 괴로울 때마다 이 모든게 남편 때문이라고 말해버리듯이 (-_-;;;)말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예수쟁이라고 하며 심하게 욕한다면, 만에 하나 어머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신실한 신자일 경우 곤란해질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시댁 가까이 살면서 어머님을 보살피고 때때로(아니 자주) 어머님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주는 시누이는 신실한 크리스천이다. 이런 걱정 없이 내가 갑이 되어 마음놓고 욕할 수 있는 대상, 바로 정치인.
4년간 낯선이들과 생활했던 보훈병원은 또 어떤가. 병원도 텃세가 심한 곳이다. 특히나 장기입원 노인들이 99%인 보훈병원 재활의학과 병동에선말이다. 텃세와 분쟁 때문에 보훈병원 병실엔 TV가 아예 없다. 병원생활은 작은 편의와 도움, 생활팁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주변 사람들이 야당과 전 대통령 부부를 욕한다. 어머님이 더 크게 더 심하게 욕을 한다. 그들은 같은 편이 된 어머님에게 작은 친절과 편의를 베풀었을것이다.
슬펐다. 남편이 느끼는 슬픔이나 화 와는 조금은 다른 결로 말이다. 집에 도착해 넉살 좋은 삼촌은 다음 달엔 이모부 소유의 안동 하회마을 고택에서 자식들까지 포함한 만남을 추진하자 했다. 그러나 어머님은 나오는 길에 내 주머니에 돈다발을 쑤셔 넣어 주셨고, 또다시 상처입은 남편은 안동이고 나발이고 이제 두번다시 여행은 없다, 고 선언했다. 그야말로, 파국이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