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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무 Aug 12. 2020

길 건너는 달팽이

길 건너는 달팽이

 비 온 뒤 직장을 향해 천변을 따라 걷다 보면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평소 나뭇잎이나 풀숲에 있었을 보이지 않던 달팽이들이 여기저기 인도에 나와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자칫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바삭하고 달팽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것이므로 땅을 쳐다보며 걷는다. 따로 운동할 시간을 낸다는 것이 여간 해서는 내키지 않으므로 언젠가부터 생활 가운데 운동을 곳곳에 심겨 놓았다. 출근할 때 4-50분, 퇴근할 때 4-50분, 여름철이 아닐 때는 점심 식후 2-30분 짬짜미 걷는다. 근래에는 파워 워킹에 재미를 들였다. 팔꿈치를 직각으로 굽히고 걸을 때마다 상하로 휘젓는다. 마치 군인이 절도 있게 걷는 것이 그려지지만 내 모습은 가끔 유리창 옆을 지날 때 보면 그다지 폼이 나진 않는다. 이렇게 걷다 보면 천변에 사시사철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감상하게 된다. 싱그럽게 피어난 꽃들과 안녕이라고 속삭여 보기도 한다. 내 지인 중 한 사람은 이 나무와 꽃들과 대화를 한다고 한다. 화창한 날이면 온갖 나무와 꽃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반겨 주고 교감을 흠뻑 나눈다고 하는데 난 그 정도에 미치진 못하지만 그래도 속삭이듯 인사는 나누며 정겹고 미소를 짓고 걷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비 온 다음 날이면 아침에 길을 걸을 때 달팽이들이 지천에 길을 건너고 있다. 아마 한쪽에서 풀들을 먹다가 다른 곳의 풀이 먹고 싶었던 것인지, 환경을 바꾸려는 지, 대 이동을 한다.   문제는 이 달팽이들이 작고 느리다는 데 있다.

                                                  


 이 속도로 저쪽 풀밭에 언제 도달할까? 사람들이 속속 천변을 걷기 시작하는데 어쩌려고 이 달팽이들은 길에 방황하고 돌아다니거나 길을 건너려고 하는지. 여러 차례 길 한복판에 있는 달팽이들을 주어 건너편 풀숲으로 던져주곤 하지만 역부족이다. 모든 달팽이들을 다 돌아볼 수는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실제 간혹 여기저기 압사당한 달팽이들의 사체들도 보인다.  혹 놓치고 밟지 말기를 바라며 걷지만 언제 바삭 소리가 내 발 밑에서 들릴지 모른다. 일터에 다다르면 안도의 숨을 내쉰다. 며칠 후 또 비가 왔는데 이번에는 길을 거의 다 건넌 달팽이 몇이 보였다. 사실 그런 달팽이가 있는지 의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거의 건너편 풀 숲에 거의 도달한 달팽이들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내라! 거의 다 왔어.



 수 일이 지나 또 비가 왔다. 역시 달팽이들이 여기저기 길에 나와 있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가는 녀석, 좌측에서 우측으로 가는 녀석, 좌측에 치우쳐 머무는 녀석, 우측에 머무는 녀석, 길 한복판에 헤매는 녀석, 그리고 방향을 잘못 잡고 종으로 길을 가는 녀석, 언제까지 길을 가려고 저 방향을 향해 가는지 정말 답이 없는 녀석도 있다. 저러다 어느 행인의 발 밑에 횡사하려는 게야.

 우리는 다 길을 가고 있다. 운명적으로 태어난 이상 어딘가 걸어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분명히 갈 길을 정하고 가지만 어떤 사람은 길을 나서 가다 보니 걷고 있는 사람도 있다. 걸으며, 하염없이 걸으면서도 어디로 가야 하나? 한숨을 내 쉰다. 어떤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어디로 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냥 걸어야 하니 걷는다. 비 온 뒤 길에 나온 달팽이처럼 때론 잘못된 길로 정처 없이 걷기도 한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길에 서서 살펴보고 옛길을 물어보아라. 좋은 길이 어디인지 물어 그곳으로 걸어가라. 그러면 너의 혼이 안식을 얻게 되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곳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예레미야 6:16)


 얼마 전 바다거북 안에 내비게이션 같은 기능을 하는 무언가가 있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용케도 찾아간다는 과학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연어는 우리로써는 이해할 수 없이 기이하게도 시내에서 자라 대양으로 갔다가 다시 그 태어난 시내로 돌아온다. 그 무언가에 이끌려. 사실 우리 존재는 무언가 희미한 북극성 같은 것이 있어 내가 지금 가는 길이 그 길이 아닐 수 있다는 소리 없는 신호를 받곤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다는 아니야. 이 방향으로 간다면 나의 인생은 의미가 없어. 그래서 가던 길을 돌아서기도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평온을 찾을 때까지 방향을 수정하기도 한다. 때론 누군가가 간 길이 마음에 와 닿아 그 길을 걸어보기도 한다.

내 지나온 인생의 길을 보더라도 십여 차례 크고 작은 방향 전환이 있었다. 그때 그 지점마다 계기들이 있었지만 결국 돌아보니 그 어떤 한 방향을 향한 끊임없는 방향 전환이었다. 남들이 다들 걷는 길이니 그리로 가보았지만 그것이 내게는 맞지 않았다. 좋아 보여 선택했지만 그리고 무언가 얻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내 길이 아니었다. 내 깊은 존재로부터 평온을 얻도록, 그래서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하는 행동과 내가 하는 말이 하늘을 우러러 그다지 부끄럽지 않도록 이끄는 무언가의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옛날 별자리를 보며 항해한 뱃사람들처럼 우리 안에 희미하게 느껴졌던 어떤 들리지 않는 미세한 느낌이 여러 방향 전환 가운데 그 길을 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비가 갠 후, 날씨가 맑아 친한 벗들과 함께 물안개 공원에 이른 오전부터 걸었다. 수년간 볼 수 없었던 청명한 하늘과 밝은 햇빛이 휴양지에 온 듯했다. 그런데 길 곳곳에 강한 햇빛으로 길 한복판에 생애를 마감한 달팽이 몇 마리가 보였다. 그 뒤로 달팽이의 점액질이 그가 어떤 길을 갔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았다. 우리의 인생길에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조기에 생애를 마치지 않도록 기도해보며 다시 길을 걷는다. 지인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발길을 자꾸 멈추게 하는 달팽이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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