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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무 Aug 15. 2020

이차 이득

 큰 아이가 중학교 2-3학년 시기이니 15년 전쯤 이야기이다. 지하철 두 개 노선이 지나고 있는 교통 편의시설이 좋은 지역에 살다가 자녀 교육을 위해 학원이 밀집된 지역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당시 살던 곳은 교통이 편하긴 하였지만 주변이 술집과 유흥가 그리고 실내경마장 등의 시설들이 많아 자녀를 키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 비교적 면학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부부가 다 직장을 다니다 보니 자녀 교육에 정보가 없어서 그랬는지, 그 이전에는 많은 자녀를 둔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였었다. 무리해가며 그곳으로 옮겼고 아이를 유명한 K 영어학원에 다니도록 했다. 많은 학부모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아이에게 해줄 것을 해준다고 생각하였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저녁에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 아이가 방에서 무언가를 끙끙대면서 하고 있었다. 무언가 어깨너머로 보니 백 개의 영어 단어가 적힌 프린트물을 갖고 씨름하고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학원 숙제란다. 매일 백 개의 영어 단어를 외워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좀 이상하다 싶어 아이가 학원 가 있을 때 그 학원을 방문해 보았더니 수십 명의 학생들이 방안에 조밀하게 앉아 있었고 선생님은 보이지도 않았고 아이들은 단어장을 놓고 아이가 씨름했던 것 같이 영어 단어들을 외우고 있었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학교나 학원에서 공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복도에는 이 학원을 통해 유수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의 이름과 출신 고등학교 이름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머리를 스치며 드는 생각은  학원이라는 곳이 소수의 상위 몇 프로에 해당되는 학생들에 대해 심혈을 기울이고 나머지 아이들은 들러리구나. 그래서 상위권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은 이 학원의 브랜드 네임을 높여주고, 나머지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한밤중 불에 달려드는 나방들과도 같이 그저 모여들어 우글우글거리고 있구나. 나 같은 바보 같은 부모들은 그것도 모르고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부모의 도리를 다했구나 하고 자족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한 번의 장면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섣부른 것이겠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무언가 배신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학원을 더 이상 다니지 말라고 하였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중학교 들어가며 적성검사와 인성검사 이런 검사들을 해보면 큰 아이는 감수성, 창의성은 최고의 수치를 보이나, 암기는 중간 정도의 수치가 나오곤 하였다. 우리나라 교육이 아직도 암기 위주인데 큰일이다 싶었다. 게다가 중2 때 미국 California주 Irvine에 있는 학교에 여름 캠프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곳의 학교생활이 아이에게는 너무나 잘 맞았다. 교장선생님은 일본계 미국인이었는데 진정으로 아이들의 인성을 돌보고 아이들을 참으로 관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아이를 한국에서 키워야 하나 외국에서 키워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지인 중 한 사람의 여동생 부부가 뉴질랜드에 사는데 너무 환경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 여동생의 어린 자녀 중 한 아이가 자폐 경향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돌보아 주는 것이 너무도 세심하고 크나큰 도움을 주었고 그 외에도 사회적 돌봄이 그 부부의 마음을 깊이 감동하게 하였는데, 어른이 되어 뉴질랜드로 이민 갔었는데도 뉴질랜드 국가가 흘러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많지도 않은 휴가를 끌어다가 부부가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올라탔다. 당시 이와 같은 문제로 같이 고민하던 세 가정이 있었는데 우리 부부가 일단 선발대로 뉴질랜드를 탐방하고 오기로 하였다. 한국인 여성분을 가이드로 하여 우리의 의도를 알려드렸더니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안내를 받게 되었다. 이민 고려했기 때문에 거주할 공간도 안내해주었다. 단독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지어진 집들 중 한 집을 모델하우스로 공개한 곳도 여러 군데를 데리고 갔는데 그냥 귀국하지 않고 뉴질랜드에 눌러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올라왔다. 어떤 이층 집은 일층에서 엄마가 음식을 다 준비하면, 벨을 울리면서 2층에 있는 아이들에게 '식사 다 준비되었으니 내려들 와'하면 아이들이 '네' 하고 와르르 내려오는 것이 눈 앞에 그려졌다. 그래 바로 이것이 사람 사는 것이지 닭장 같은 아파트에 위층, 아래층 소음 난다고 악다구니를 하며 사는 이건 아니야. 바닷가도 데려가고 초지도 데려가고 한국 분이 하는 토마토 농장도 데리고 갔는데 25평 정도의 온실 안에 수경재배로 토마토를 재배하고 있었는데 토마토가 덩굴나무였고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나무처럼 온 온실 안을 하나의 나무가 덩굴로써 휘감아 자라며 토마토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은 국가의 농경 연구소에서 제공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여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가이드는 고추가 나무로써 다년생으로 자라고 있는 곳을 포함하여 이런 장면을 몇 군데 더 보여 주었다. 왜 이런 곳을 보였는가 의아해하였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민 오게 되면 일단 한국에서 우리의 전문직은  별도의 각고의 노력이 없는 한 할 수 없음으로 이런 곳을 보여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훌륭하고 사려 깊은 가이드였다. 오빠도 뉴질랜드로 이민 온 분이었다. 그 가이드 집에 초대되어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집은 우리나라로 치면 전원주택인 셈이었다. 아! 뉴질랜드, 정말 귀국하기가 싫었다. 그런데 오가는 차 안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국인 이민이 늘면서 부끄러운 일들도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중 몇 가지는 이곳 아이들은 순하고 길거리에서 떼를 쓰고 하는 것이 없는데 한국에서 온 아이들이 처음에는 한국에서 하는 대로 행동하면서 눈총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수년이 지나면서 이 아이들이 점점 현지인들처럼 변화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뉴질랜드에서는 치맛바람이 없었는데 한국 부모들이 이민 와서 한국에서 하던 행동을 하곤 하여, 심지어 뉴질랜드 선생님들 중에서는 이에 익숙해진 분도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수출해야 할 것을 수출해야지 이런 부끄러운 일들을 이곳 청정지역에 수출하다니.


 일차 이득은 내가 사회적으로 공감하는 순 기능을 가진 어떤 직업을 통해 그 일을 얻게 되는 이득이다. 예를 들면 학교의 교사라면 학생들을 가르치며 수고함으로써 얻어지는 이득 즉 월급, 학생들이 개선되는 것을 봄으로 오는 뿌듯한 마음과 보람, 이런 것이 일차 이득이 될 것이다. 의사라면 환자를 치료하면서 받게 되는 물질적 보수와 환자의 치유로 인해 발생한 이타적 마음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될 것이고 정부 중앙부처 행정가라면 자신이 입안하고 수행한 정책의 결실을 보면서 받는 자부심과 보수 이런 것이 될 것이고 농업에 종사하는 분이라면 일 년 내 구슬땀 흘리며 뿌리고 가꾼 결과에 대한 수확이 일차적 이득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차 이득은 우리가 일하게 되는 원동력을 주고 동기를 부여해주고 사회를 윤택하게 하고 부가가치를 산출하게 된다. 이러한 일차 이득이 정당히 돌아가도록 사회는 설계되어야 하고 보장되어야 한다.


 이에 반해 이차 이득은 그 직분을 성실히 하게 됨에 따라 항상 발생하진 않지만 그 직분에 도움을 받게 된 사람들이나 상황에 의해 받게 되는 이득이다. 예를 들면 선생님의 경우 학부모가 자기의 자녀가 그 선생님의 훌륭한 지도 덕분에 학업의 성취도가 올라가고 인격이 함양되고 그러므로 감사한 나머지 촌지를 드리게 되면 이것이 이차 이득이다. 의사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환자나 보호자 가족 가족부터 잘 치료됨으로 맘 속 깊이 감사한 나머지 어떤 분은 집에서 농사지은 참기름을 들고 오기도 하고 어떤 할머니는 꼬기꼬기 접힌 돈을 쥐어주기도 한다. 이것이 이차 이득이다. 이러한 이차 이득은 역시 건강한 것이고 서로에게 감사하고 감상하고 인간적이고 역시 사회를 윤택하게 해 줄 수 있다.


 레지던트 1년 차 때에 지방에 있는 병원에 근무할 때였다. 음료 병에 들어있던 제초제로 쓰는 그라목손을 실수로 마셨다가 음료수가 아니므로 뱉어낸 40대 초반이었을 가정 주부였다. 들이마시지 않았더라도 이 정도 만으로도 사망에 이를 만큼 그라목손은 독성이 강했다. 이 환자분에게도 그라목손 중독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손상이 다 발생하였다. 최근에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다양한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하나, 25년 전인 당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산소 흡입 농도를 낮추고 신부전이 발생하여 임시적 복막투석을 하였고, 간독성에 대해 보전적 치료를 하고 그러다 염려스러운 폐 손상의 징후가 나타났다. 아 이젠 안 되는 것인가 할 때 기적적으로 거기서 멈추었다. 당시 그라목손 중독에 걸린 환자가 살아 집으로 돌아간 예를 본 적이 없었다. 담당 주치의로서 내 마음은 너무나도 기뻤다. 환자가 퇴원하는 날 지금도 잊을 수 없는데 남편이 감사의 뜻을 표시하시면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담소를 나누고 헤어진 후 얼만 지나지 않아 환자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환자 자신이 왔다. 나는 깜짝 놀라며 남편께서 방금 감사의 마음을 표하셨는데 왜 또 그러시냐고 만류했는데 남편은 남편이고, 나는 나라고 말씀하시며 막무가내였다. 두 분이 주신 촌지는 당시 레지던트 월급에 가까운 것으로 기억한다, 일차 이득에 따른 이차 이득이 발생한 셈이었다.


 막내 아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당시 S선생님께서 담임이셨는데 훗날 교감이 되셨고 인천에 있는 국제학교에 교장으로 스카우트되어 가셨다. 아이들을 사랑하며 당시 immersion 학습방법을 도입하는 등 열의가 대단한 선생님이셨다. 학부모들이 촌지를 가져가면 “제가 아직 인격 수양이 덜되어서 받지 못합니다.”라고 하시며 단호히 거절하시곤 한 것으로 유명하셨다. 이차 이득이 선행되면 자신의 본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학생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다른 의도를 갖게 될 것에 대해 스스로 엄격히 제한하시려 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 부부와 막내 아이는 이 K선생님을 존경하여 졸업 후에도 찾아뵌 적이 있었다.


 나는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은 목자도 아니고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 가고 흩어지게 합니다.(요 10:11-12)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맡은 바 자신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떤 이유든지 이차 이득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순수함을 잃는 것이고 타락한 것이다. 일차 이득을 염두에 둔 행동, 이차 이득을 유도하는 행동, 심지어 이차 이득을 강요하는 행동은 부패하기까지 한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며 이러한 이차 이득으로 인해 본분을 행함에 있어 그릇되게 행동하고, 잘못된 주장을 하고, 때론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일들을 발생시키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일차 이득에 충실하고 이차 이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서로 대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살맛 나는 사회이겠는가. 그런 사회가 어디 있겠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전체적 분위기는 그렇게 사는 나라들이 지구 상에 존재한다. 우리 후손에게 그런 사회를 물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법적으로는 김영란법이 통과되어 어느 정도 이런 사회로 가는 길이 열렸다. 그런데 문화가 바뀌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들의 존재가 바뀌는 데에는 더 시간이 걸린다. 이차 이득을 바라게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은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이차 이득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편법으로, 공정한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닌, 쉽게 이득을 얻으려는 사심에서 유발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쉽게 새치기하여 불공정 경쟁을 하려는 마음이 정죄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삯꾼 목자는 이차 이득을 우선시하는 사람이다. 양들이 일차 목적이 아니므로 이차 이득이 주이므로 양 떼들의 안위는 자신이 얻을 삯에 비해 중요한 것이 아닌 목자들이다. 그러나 그 양 떼의 주인인 참된 목자는 양 떼들을 헤치려는 늑대들이 올 때 목숨을 내놓고 양들을 지키려 할 것이다. 양 떼들 자체가 목적인 사람이 참된 목자인 셈이다. 학생들 자신이 목적이고, 환자들 자신이 목적이고, 백성 자신이 목적인 교사, 의사, 정치가가 참된 목자들이다. 우린 인생의 참된 목자들을 만났는가? 우리들이 참된 목적인 참된 목자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자신을, 우리 존재를 참으로 관심하는 목자를 만나고자 하는 갈망이 내게 있는가? 자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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