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날씨에 반해버린 곳
화씨 100도를 넘나드는 예상치 못한 더위에 요세미티에서의 차가운 밤공기는 구경도 하지 못한 채 다시 1번 해안도로를 향해 내륙을 빠져나왔다.
3시간여를 달리는 동안 수없이 많은 포도밭과 옥수수밭을 지나며 그 엄청난 규모에 입이 떡 벌어진다.
요세미티를 떠나면서부터 틀어둔 에어컨이 왠지 춥게 느껴져 창문에 얼굴을 기대 보니 델 듯 뜨겁던 열기는 사라지고 차가운 감촉이 전해진다.
온도계를 살펴보니 65도이다.
창문을 열었다.
차갑고 상쾌한 바람이 머리칼을 간지럽힌다.
아- 내가 그리던 완벽하게 청명한 가을 날씨를 닮았다!
내가 사는 괌처럼 바로 옆 바다를 끼고 있지만, 너무도 다른 검푸른 파도의 청명한 가을 날씨를 지닌 몬터레이의 첫 모습에 홀딱 반해버렸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옷부터 갈아입었다. 100도에서 60도로 이동했으니 섭씨로 환산해보자면 37도 한여름에서 15도 늦가을로 이동한 거다. 긴바지와 긴팔 옷을 챙겨 입고, 한국의 가을 하늘을 닮은 청명한 맑은 하늘에 감탄하며 근처의 몬터레이 수족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몬터레이 수족관은 영화 '니모를 찾아서'의 배경이 된 바닷가를 옆에 낀 세계적인 대형 수족관이다. 수족관을 충분히 즐기려면 하루의 시간으론 부족하다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마침 우리가 묵는 호텔 사이트에서 티켓을 발권하면 하루 입장권으로 이틀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모션이 진행 중이라, 여유 있게 이틀간 둘러볼 수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그동안 여행을 하며 많은 곳의 수족관들을 방문했었지만, 이곳처럼 나를 반하게 한 곳은 없었다.
수족관 곳곳에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바다를 내다볼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이 있는 넓은 광장으로 이어진다. 곳곳에 놓인 망원경을 이용해 바다 위에 떠있는 해양동물을 볼 수 도 있고, 신기한 바다새들을 관찰할 수도 있다. 날씨는 얼마나 좋은지 평생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큰 축복을 받은 것처럼 부러워지는 곳이다.
수족관에 들어서며 챙겼던 프로그램 안내서를 꼼꼼히 읽으며 시간에 맞춰 공연도 보고, 설명도 듣고, 바다 동물 먹이주기도 구경했다. 늦은 오후였지만, 공연장에 드리운 따가운 캘리의 햇살은 차가운 바람과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오후를 선사했다.
출출해진 우리는, 멋진 뷰가 보이는 수족관 내의 카페테리아에 앉아 랍스터 롤과 피시 앤 칩을 먹었다. 어느 멋진 카페에서도 이렇게 완벽한 뷰를 보여줄 순 없을 거라 생각했다.
수족관을 나온 우리는 바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드문 드문 날고 있는 갈매기들이 하늘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작은 상점들을 구경하며, 귀여운 수달이 그려진 맨투맨 티셔츠도 사고, 바닷가 모래사장에 내려가 전복을 닮은 작은 조개껍데기도 줍고, 차가운 바닷물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발을 담갔다.
해가 넘어가며 쌀쌀해진 바닷바람에 오들오들 떨다, 근처 델리에서 따끈한 클램 차우더를 사 와 몸을 녹이며 먹고, 알록달록 레인보우 컬러에 홀려 구슬아이스크림집에 들어가 입안이 얼얼해지도록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클래식한 트롤리버스가 지나는 버스정류장 앞 벤치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광합성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기타를 든 아저씨가 앞에 모자를 놓고 감미로운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이 멋진 하늘 아래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낭만적인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해 뱃속이 간질간질하다. 청명한 날씨와 싸늘한 공기, 따가운 햇살까지 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
우린 해가 뉘엿 뉘엿 넘어갈 때까지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차가운 공기에 손이 시린 느낌이 들고서야 호텔을 향해 차를 몰았다.
다음 날, 우리는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페블비치의 17마일 드라이브로 향했다. 캐슬이 아닐까 싶은 으리으리한 대저택들을 지나 해안가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뽀얀 백사장도 보인다.
7월 중순의 몬터레이는 한국의 늦가을 날씨를 연상케 했다.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뜨거운 커피를 찾게 되는 날씨
가을을 사랑하는 나에게 몬터레이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저 멀리 바닷새가 가득한 돌섬은 새의 분비물로 하얗게 변해있고, 바로 앞에는 다람쥐들이 돌 사이를 누비며 뛰어다닌다. 바닷가 돌산 위에 홀로 우뚝 솟아있는 소나무도 보인다.
세계 3대 골프장 중 한 곳인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페블 비치 골프 클럽을 돌아보며, 언젠가 이곳에서 대회에 참가할 아이들의 모습을 꿈꿔본다.
17마일의 드라이브를 끝내고 찾아간 곳은 카멜 바이 더 씨라는 예술가 마을이다.
우리를 홀딱 반하게 만든 솔뱅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동화 같은 곳이었다.
골목의 주욱 늘어선 갤러리들이 눈길은 사로잡는다. 평일의 한적한 카멜 거리를 걸으며 아기자기한 작은 상점들을 들러보고, 눈을 뗄 수 없는 달콤함이 가득한 카멜 베이커리에 들러 빵도 구입하고,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멋진 바가 있는 레스토랑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을 곁들여 굴튀김과 생굴을 먹었다.
먹고 마시고 여행하는 순간순간이 내 인생의 낙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일 년 내내 내가 열심히 일하고 돈 버는 이유는, 이런 시간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늦은 오후, 우린 다시 몬터레이 수족관을 찾았다.
어제 다 보지 못했던 프로그램들을 관람하고, 야외 공연이 끝난 텅빈 관람석에 앉아 오래도록 길게 늘어지는 따가운 캘리의 햇살을 맞았다.
눈을 감고 바람을 맞으며 바다의 소리를 듣는다.
따스한 햇살이 찬바람에 오싹해진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아이들은 망원경에 동전을 넣고 바다 위의 해달을 찾고 있다.
낭만적인 이 도시, 몬터레이에 언젠가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몬터레이를 떠나는 날,
우리는 미리 찜해두었던 근처의 호수 공원으로 향했다.
야구장과 큰 놀이터가 있는 호수를 낀 예쁜 공원.
나무 밑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앉아, 오랜만에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기다렸다.
구름다리를 건너고, 클라이밍도 하고, 그네도 타며 원 없이 놀게 내버려 두었다.
놀이터가 질릴즈음, 반짝이는 호수로 가서 오리배를 탔다.
귀여운 오리들이 떼를 지어 떠다니는 연못에서 힘이 다 빠질 때까지 페달을 밟으며 커다란 오리배를 탔다.
저 멀리 호수 속 작은 섬으로 가까이 가보니 긴 다리를 가진 신기하게 생긴 새가 한 마리 있다.
날은 시원하지만, 햇살은 따가웠다.
우린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리는 줄도 모르고 콧등에 송글 송글 땀이 맺힐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호수 위에 떠있었다.
공원에는 주말을 맞아 도시락을 싸들고 나와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좋은 공원이 근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너무 부럽다!
우린 근처의 인 앤 아웃에 들려 언제 먹어도 맛있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고, 다시 1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몬터레이의 청량한 공기가 가슴 깊이 오래 남아있을 수 있게 창문을 끝까지 내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 여행의 계획되지 않았던 유일한 목적지! 모로베이를 향해서 달리고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