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취하고, 낭만에 취하다
이번 여행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이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나만의 비밀장소로 평생 간직한 채 몰래몰래 다녀오고 싶은 곳, 모로베이.
내 마음을 쏙 빼앗아간 평화롭고 고요한 그 바닷가 마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노을 진 바닷가를 배경 삼아 갓 잡아온 싱싱한 해산물을 안주삼아 마시는 화이트 와인이 얼마나 달콤한지,
해가 지고, 해가 떠오르는 하늘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눈만 감으면 그 순간 속으로 빠져들어 촉촉한 바다의 공기가 나를 감싸고, 하얗고 늘씬한 바닷새가 하늘을 가르며 멋지게 비행하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여느 때처럼 이번 여행도 모든 호텔 예약과 스케줄을 괌을 출발하기 전부터 미리 확정해 놓았었다.
그런데 딱 하룻밤! 몬터레이를 떠나 LA로 돌아오는 길에 비어있는 하루가 있었다.
1번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대략적인 방향은 정해져 있었지만, 어디에 들러 마지막 하루를 보낼지 끝까지 정하지 못한 채 계속 미뤄두었다, 몬터레이를 떠나던 그날에서야 비로소 확정을 지었다.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그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나는 결정했다.
모로베이로 가자!
해안도로를 지나는 많은 여행객들이 잠시 지나쳐 가기는 하지만, 대부분 한번 둘러보고 쉬었다 가는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 그래서 여행 후기도 많이 없던 바닷가 작은 어촌마을.
난, 이곳에서 우리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람이 북적이는 인기 관광지보다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마지막 밤을 멋지게 보내고 싶었다. 호텔도 그리 많지 않은 곳이라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 당일 예약 가능한 곳이 남아있었고, 그렇게 우린 아름다운 해얀 도로를 따라 모로베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호텔에 체크인을 마치고, 바로 바닷가로 향했다. 작은 마을이라 이동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조용한 선착장을 따라 작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그 길의 끝에 우리가 가려는 레스토랑이 자리 잡고 있다.
바다를 옆에 낀 멋진 식당!
화려하거나 고급스러운 곳이 아닌 이곳은, 뱃사람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다. 바다를 바로 밑에 둔 널찍한 야외 패티오 위에 여러 개의 테이블이 놓여있고, 작은 건물 안에 들어가면 주문을 받는 두 명의 직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커다란 유리 진열대 안에는 갓 잡아온 물고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손님은 원하는 해산물을 골라, 그 무게에 따라 금액을 지불하고 찌거나 튀기거나 굽는 등 원하는 조리법을 말하면 주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조리해 나온다.
음식이 나오면, 마이크로 손님 이름을 부르고, 직접 찾아와 먹는 셀프서비스 식당이다.
식당에 들어서자, 사방을 둘러싼 멋진 바다의 풍경과 저 멀리 모로락이 보인다. 길게 늘어진 햇살을 받아 빛나는 손님들의 왁자지껄 수다 소리와 흥겨운 음악이 들린다. 빈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이 많다.
테이블 위에는 굴과 생선요리들이 보이고, 테이블마다 와인이나 맥주가 올라와있다.
사람들 모두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 반짝이는 햇살 아래서 먹고 마시는 모습이다.
우린 간신히 구석에 빈자리를 하나 찾아 자리를 잡고, 요리를 주문하기 위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굴 양식장이 근처에 있어 굴요리가 유명하다고 들었던 터라 구운 굴을 잔뜩 시키고, 유리 진열대 안에서 맛있어 보이는 물고기 두 마리를 골라 각각 그릴과 딥 프라이를 요청했다. 옆에 있는 작은 음료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칠링 된 화이트 와인도 한병 골랐다.
잠시 뒤, 우리가 시킨 음식이 나왔다. 손바닥만 한 싱싱한 구운 굴이 먹음직스럽다. 미리 준비해온 초고추장 튜브를 꺼내 굴 위에 쭉 짜서 한입 베어 무니 굴즙이 뚝뚝 떨어지며 호로록 넘어간다. 너무 맛있다.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니, 비로소 행복감이 저 아랫배에서부터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구운 생선도 맛있지만, 높은 온도의 기름에 아무 양념도 없이 통째로 담가 튀긴 딥 프라이드 피시는 겉은 바삭 고소하고 속살은 살살 녹아내린다.
망설일 것도 없이 다시 건물로 들어가 줄을 서고, 4마리의 튀긴 생선을 더 주문했다. 새우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새우튀김도 시키고, 모자랄 것이 예상되는 와인도 미리 한병 더 사 왔다.
18년을 함께 산 나와 남편이 가장 잘 맞는 것 중 하나가, 음식은 부족하지 않게 남더라도 푸짐하게 시킨다는 것이다.
선선한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늘어지는 햇살을 등지고, 흥겹고 친절한 주변 손님들과 함께 우리도 맛있는 술과 음식을 먹고 마셨다.
너무 행복하다.
와인 몇 잔에 알딸딸해진 나는, 이 편안하고 흥겨운 분위기에 점점 취해 들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마치 어릴 때 살던 동네에 놀러 온 것 같은 편안함. 사방을 둘러싼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바쁜 도시의 삶을 벗어나 오늘 하루 평화롭고 흥겹게 보내고 있는 이 친절한 사람들 사이에 껴서,
나도 함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기분을 만끽하며 맛있는 음식을 바닥이 보일 때까지 천천히 먹고, 두 번째 와인병이 바닥을 보일 즈음,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매일 오고 싶은 곳이야.
나에게 남아있는 일정이 더 있었다면 모든 걸 다 쏟아붓고 싶은 곳이다.
매일마다 이곳에 와서 흥겨운 사람들과 어울려, 이 평화로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나는 언젠가 내가 은퇴하게 된다면, 이 마을에 와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싱싱한 해산물과 와인을 먹고 마실 수 있다면.... 매일이 먹고 마시고 여행하고 글 쓰는 행복한 생활일 것 같았다...
어느덧 뉘엿 뉘엿 해가 지고 있다.
와인에 취해 긴장이 풀린 나른한 기분으로 근처를 산책하며 멋진 일몰을 구경했다.
불어오는 바람, 날아가는 새, 바다 위에 떠있는 해초를 보면서도 자꾸만 미소가 지어진다. 빨갛게 물들어 가는 하늘은 어쩜 저렇게 이쁜 걸까...
시즌에 맞춰 오면 이 잔잔한 바다 위에 해달이 잔뜩 떠다니는 걸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언제가 되었든 꼭 한번 와서 보고 싶다.
우린 다시 오던 길을 돌아가며 작은 캔디 가게에 들어가 특산품이라는 솔트태피를 종류별로 사고, 오랜만에 보는 껍질 땅콩도 한 봉지 샀다. 적당히 볶아진 땅콩이 너무 고소해, 다음날 우린 남은 트렁크를 다 채울 만큼 땅콩을 잔뜩 사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호텔 테라스에 나와 오래도록 밤공기를 마시며 하늘의 별을 관찰했다.
끝나가는 이 여행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디가 가장 좋았을까?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이곳, 모로베이다.
바닷가 노천 식당에 앉아 구운 굴을 안주삼아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따라 마신 화이트 와인은 내가 45년을 살면서 맛본 최고의 와인이었다.
매번 여행을 하며 새로운 추억을 쌓고, 특별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 기억들은 일상에서 나를 지탱하고 이끄는 힘이 되어준다.
나는 다시 나의 배터리를 풀로 충전했고,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가끔은 지쳐서 훌쩍 떠나버리고픈 힘든 날도 마주하겠지만, 그래도 힘내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의 배터리가 빨간불을 깜빡이고 충전을 요청할 때, 주저 없이 짐을 싸고 내가 그리워하는 그곳으로, 혹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