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갈 시간.
모로베이의 여운을 뒤로하고, LA 올드 파사디나로 달렸다.
우리를 집으로 데려다 줄 비행기를 타게 될 LAX 공항을 가기 하루 전, 올드 파사디나에 사는 절친 언니의 집에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요리 솜씨의 언니는 우리 가족을 위해 바비큐를 준비해 주었는데, 족히 30인분은 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을 준비해 나를 놀라게 했다. 그 많은 음식을 준비하며 고생했을 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뭉클한 감정이 솟아난다. 늘 가까이에서 보며 지내진 못하지만, 내 마음의 기둥이 되어주는 언니.
오후 내내 맛있는 식사를 하며 우린 끝도 없이 수다를 떨었다.
마치 일 년 치 밀린 수다를 하루에 끝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국을 떠나 살기 시작하면서 깊은 관계를 나누며 마음을 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나이를 들어가며 사람을 만나도 어릴 적처럼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게 되기도 했지만, 해외라는 특수한 상황은 언제든 떠나버릴 사람들과 정을 나눠야 하는, 마치 이별을 미리 정해놓고 만나는 사이 같다고나 할까...
근 20년이 되는 괌 생활 동안 수많은 그리운 이들을 떠나보내야 했고, 언젠가부턴 그런 이별의 상처가 무서워 마음을 닫아걸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난 늘 외로웠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보내는 시간은, 그런 나에게 너무도 소중했다.
언젠가는 다시 언니와 한동네에 살 날을 꿈꾸며 우린 끝도 없는 수다를 나눴다.
저녁때가 되어 언니가 추천해준 근처의 하야트 플레이스에 체크인을 하고,
한산한 풀장에 내려가 별을 보며 수영도 하고,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쬐기도 했다.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불 앞에 앉아 남편과 함께 맥주를 마시는 그 시간은 늘 행복하다.
아이들은 깔깔대며 둘이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 우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그냥 말없이 맥주를 마시는 시간. 일상에서라면, 내일 할 일들과 끝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가며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는 반대로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을 테지만, 지금 우린 여행 중이다. 내 머릿속은 완벽히 자유롭고, 그냥 그때그때 내가 하고 싶은 일들만 생각하면 된다.
행복한 여행의 시간들.
다음날, 우린 올드 파사디나 시내로 나갔다.
괌에는 없어 늘 SNS 사진으로만 보았던 블루보틀에 가서 고소한 라테도 마시고,
언니가 꼭 가보라던 빵집에 가서 괌으로 가져갈 빵도 한 보따리 샀다.
멋진 하늘을 뽐내는 캘리의 날씨를 즐기며, 동네를 천천히 산책했다.
쇼핑몰에 가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서점에 들러 딸이 사고 싶어 하던 책도 사고, 푸드코트에서 각자 취향에 맞춰 점심도 먹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늘 차가 빼곡한 LA의 트래픽을 고스란히 느끼며 공항 옆, 이번 여행 마지막 호텔을 향해 달렸다.
언제나 그렇듯, 여행의 마지막 날은 늘 바쁘고 정신없이 지나버린다.
여행이 끝나는 슬픔을 막기 위한 나의 무의식적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저녁 먹을 시간도 놓친 채 바삐 움직이던 우리는 호텔 1층에 있는 피자집에 내려가 피자를 사다 저녁을 먹고,
나는 다시 끝없는 짐 싸기에 돌입했다.
기내에 꼭 가지고 타야 하는 것, 내일 아침까지 사용하다 넣을 것, 이 가방 저 가방에 마구잡이로 섞여 있던 빨래들을 잘 정리했다.
그간 소소하게 사들인 쇼핑용품들도 가방에 공간을 만들어 꾹꾹 눌러 담고, 여행 중 너무 낡아버린 슬리퍼와 운동화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똑같은 짐 싸기지만, 여행을 시작할 때와 끝낼 때의 짐 싸는 마음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설레는 맘으로 이 가방에 차곡차곡 짐을 넣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설레던 시간은 모두 지나고 이제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
새벽까지 짐을 싸고,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번 여행을 쭉 돌이켜 본다.
모든 순간순간이 아름답고 소중하다.
또 한가득 추억 보따리를 채워 마음속 깊이 보관해 둘 수 있게 되어 든든하고 뿌듯하다.
아이들도 나만큼 행복했기를...
우린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