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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솜 Feb 08. 2022

백년해로와 다음 세상

"오빠, 이다음에 내가 죽으면, 오빠는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려다가 헝클어진 침대 이불을 보면서 내 생각을 하게 될 거야. 옛날엔 솜이가 늘 이불을 정돈해줬지, 하고 말이야. 그리고 아마 그 생각을 하다가 지금 이 장면도 생각나겠지. 솜이가 나한테 자기 먼저 죽으면 아침마다 내가 이불을 보면서 자기 생각을 할 거라고 말했었는데, 하고 말이야."


휴일 아침 나보다 먼저 일어나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던 남편이, 오전 열 시가 넘어 거실로 나온 나에게 대답했다.


"너무 슬프다."






결혼한 지 얼마쯤 지났을 때였을까. 남편의 회사와 나의 회사는 지하철로 두어 정거장쯤 떨어진 거리라 지하철 대신 승용차로 같이 출근을 했었는데,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우리는 백설 핫도그나 풀무원 만두, 사과 같은 것들을 나누어 먹곤 했다. 남편이 그렇게 해달라고 먼저 요청을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마트에서 도시락용 락앤락을 사 온 이후, 자연스럽게 아침 도시락을 싸는 것은 나의 몫이 되었다. 남편보다 알람을 30분 앞에 맞추어 놓고 먼저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남편을 깨웠다. 그가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전자레인지에 핫도그를 데우고 사과를 깎았다. 결혼 전 엄마가 아침마다 차려주는 밥상을 그렇게나 홀대했던 내가 말이다.


퇴근 후 '번개'가 잡힌 날이었다. 도망가고 싶었던 내 발목을 붙든 사람은 다름 아닌 실장님이었다. 하아.. 한숨을 쉬며 횟집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자리도 실장님 옆자리였다. 재빠르게 신발을 벗고 구석 자리를 선점했어야 했는데 한 발 늦었다. 솜이 씨는 왜 회를 못 먹냐, 그냥 한 번 먹어보지, 로 말을 꺼낸 실장님이 갑자기 물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500만 원이 아깝지 않은가? 유럽 한 번 가자고 쓰는 500만 원이?"


5년 근속마다 주어지는 한 달간의 유급휴가를 이용해 유럽 여행을 떠난 어느 직원을 겨냥한 질문이었다. 반년 전 신혼여행으로 유럽에 다녀온 동료가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큰돈이기는 하죠. 뭐 그래도 가고 싶으면 어쩔 수 없으니까..”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실장님의 화살이 나를 겨냥했다.


“솜이 씨는 결혼하니 어때? 신랑 아침은 챙겨줘?”


“네, 출근하면서 같이 차 안에서 간단하게 먹어요.”


“그럼 OO 씨는? 아침 먹고 출근해?”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던 OO 씨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끝을 냈어야 하는데 내가 그만 세 치 혀를 놀리고 말았다.


“언니, 언니가 아침 차리는 거, 그거 열 받지 않아요? 아니 출근 준비는 우리가 더 오래 걸리는데, 아침까지 챙기느라 더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요.”


유럽 신혼여행녀가 복화술로 대답했다.


“솜아, 아하하하.. 그만..”


입질 온 낚싯대를 챔질 하듯 실장님이 말을 꺼냈다.


“열 받는다고? 남편 밥 차려주는 일이 열 받는 일인가? 솜이 씨는 그게 열 받아? 허허.. 오늘 아주 재미있는 화제가 나왔네. 그래, 오늘은 그거에 대해 얘기를 해보면 되겠다!”


어이쿠~ 실장님, 솜이 씨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어쩌고.. 저쩌고.. 너무 사랑해서 어쩌고.. 저쩌고.. 대각선에 앉아 있던 과장님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얘기로 내 열 받는 이야기를 그저 농담이었던 것으로 만들고 있는 사이, 유럽 신혼여행녀가 다시 한번 복화술을 했다.


“솜아, 어떻게 좀 해봐. ㅜㅜ”


둘이 똑같이 직장에 다니면서 당연한 것처럼 내가 아침을 챙기는 일보다 더 열 받는 이 상황을 어디 한 번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임하고 싶었지만, 진땀 뻘뻘 흘리는 과장님과 복화술의 달인 유럽 신혼여행녀의 눈치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하아.. 실장님! 제가 그러니까.. 결론을 딱 내겠습니다. 저는, 저는 그러니까, 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랑 결혼하겠습니다!!!”


과장님이 와하하하 웃으며 박수를 치고, 복화술의 달인 유럽 신혼여행녀가 오호호호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는 사이,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은 실장님이 그럼, 그래야지! 됐어, 그럼! 하고 허허 웃었다.






윌리(반려견)가 지금 화장실 치워달라고 낑낑댄다, 한마디에 주말 늦잠을 반납하고 일어나 화장실 청소를 시작하는 남편. 그러나 샤워 전 떼어놓은 파스를 세면대 옆에 놓아두고 치우지 않는 남편. 아침은 뭐 먹을 거야, 하고 물어서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오빠가 밥 해, 하면 나가서 밥부터 안치는 남편. 그러나 신혼 때 먹던 아침 도시락은 응당 내가 준비하려니 했던 남편. 재택근무를 하다 말고 설거지 소리가 나면 부엌으로 나와 내가 할게, 나와, 하는 남편. 그러나 세탁기 다 돌아가면 꼭 널어줘, 하고 출근한 내 부탁을 까맣게 잊어버린 남편..


실장님, 사실 그때 그 말 그냥 분위기 수습하느라 했던 말인데요, 저 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랑 결혼하려고요. 남자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라 하는 소리가 아니고요, 진짜 꽤 괜찮은 것 같아서요. 하지만 아침밥 여자라서 제가 하는 거, 저 그건 열 받습니다. 그리고 유럽 가는데 500만 원, 저 그것도 안 아깝습니다. 코로나 끝나면 가게 적금이나 하나 들어야겠어요. 500만 원짜리로요.




그림에 관하여: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중 한 장면을 따라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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