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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Apr 17. 2024

그렇게 힘든데 왜 글을 쓰세요

  서너 달. 간에 바람 든 사람처럼 지냈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놓고 싶지는 않았다. 울컥 감정이 올라올 때는 브런치 앱을 열었다 닫거나, '내 서랍 저장 글'에 담아 두거나 그마저도 지워 버렸다. 그런 날을 경계했다. 글을 발행하는 텀이 점점 길어졌다.


  3월 초. 세 차례 상담이 있었다. 첫날, 종이 세 장을 받았다. 한 장엔 집을, 또 한 장엔 나무를, 다른 한 장엔 앞뒤로 여자와 남자를 전신이 나오게 그려 보라고 했다. 간단한 질문과 답이 몇 차례 오갔고 또다시 종이 한 장을 받았다. 1번부터 50번까지 후행절이 없는 문장들이 양면에 빼곡했다. 뒷부분 서술어를 완성하라고 했다. 저 이거 해 봤어요. 아 그러세요? 언제쯤 하셨나요? 2년 전쯤요. 그럼 금방 하시겠네요. 그땐 이것만 한 시간을 했는데 여긴 한 번에 여러 검사를 같이 하네요. 조금씩 다르나 묻는 의도는 같은 선행절들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왔다. 안 쓰고 넘어가도 되나요? 목에 걸린 말을 차마 뱉지 못했다. 한 문장 앞에서 3분여를 멈추어 있었다.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고 그 문장으로부터 도망쳤다.


  이미 온라인으로 작성해 보낸 TCI(기질 및 성격 검사)와 MMPI2(다면적 인성 검사 2)의 결과지를 두 번째 상담에서 받았다. 척도와 원점수와 T점수와 백분위와 백분위 그래프가 한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의 현재 상태가 이렇다는 것이지 죽을 때까지 안 바뀐다는 게 아니니 이 결과를 맹신하거나 이 결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과지 분석에 앞서 상담사가 미리 주의를 주었다.


  TCI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자극 추구 기질(NS)은 굉장히 낮은 반면, 위험 회피(HA)와 사회적 민감성(RD)은 월등히 높습니다. 인내력(PS)은 가장 낮고요. 자율성(SD)은 낮은 반면, 연대감(CO)과 자기 초월(ST)은 굉장히 높습니다. 사회적인 관계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신뢰를 받는 분이신데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좌절되어 전체적으로 우울 지수가 높게 나타나네요. 기본적으로 외부 환경에 잘 흔들리는 기질을 갖고 계신데 현재 자기 행동에 대한 통제력, 조절력, 적응력이 떨어져 있습니다.


   MMPI2의 결과는 이렇습니다. 피해 의식(RC6)과 역기능적 부정 정서(RC7)가 높고, 경조증적 상태(RC9)가 현저히 낮습니다. 내향성/낮은 긍정적 정서성(INTR)이 가장 높고요. 공포(FRS), 냉소적 태도(CYN), 사회적 불편감(SOD)의 내용 척도가 높은 편이며 가정 문제(FAM)가 가장 높네요. 불안(A)도 높고, 여성적 성 역할(GF)은 직선에 가깝에 올라가네요. 지금 뭐가 가장 힘든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서 멈춰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단 몇 번의 상담에 개인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어제는 새벽 3시까지 잠이 안 왔어요. 글을 쓰면 좀 나아지는데 에너지가 많이 들어 피로해요. 다 말할 순 없으니까. 그걸 또 선별해야 하니까. 하고 싶은 말은 시작도 못 했는데 정작 아버지는 읽고 싶어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한가하지 않데요. 그럼 나는 왜 글을 쓰지. 그때의 나와 그때의 가족을 마주하지 않은 상태로 두 분이 돌아가시면 난 어쩌지. 늘 그 지점에서 절망하게 돼요.


  선생님의 서사가 있듯이 그 시절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만의 서사가 있을 거예요. 그래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걸 거예요. 차라리 직접 원가족에게 말을 하는 게 어떨까요? 글로 말하는 건 돌아가는 느낌이에요. 이 부분이 힘들었다. 이게 싫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 이 점은 피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게 훨씬 빠르고 선생님께 좋은 방법일 것 같아요.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요. 착한 딸이었고 착한 딸이며 앞으로도 착한 딸이어야 하니까요. 어찌 됐든 다 죽어 가는 저를 살려 주신 분이고 폭언은 잠깐 눈감으면 되니까요. 아뇨 선생님. 그 폭언들이 선생님을 아프게 하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힘드신 거잖아요. 억눌려 살아오신 거잖아요. 유년과 화해하고 싶어서 글을 쓰는 거라면서요. 화해하려면 상대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알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말하세요. 글 말고 말로요. 생각이 아닌 기분을. 생각이 아닌 느낌을. 그대로 말씀하세요. 그 연습을 많이 야 좋아집니다.


  3회기 심리 상담은 끝이 났다. 한 달이 속절없이 지나는 동안 꽃들이 앞다투어 피었다. 꽃들에 마음을 빼앗겼고 꽃이 많이 핀 곳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비가 내렸고 한 무리의 꽃이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라일락과 철쭉과 튤립이 피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면 장미가 피고 아카시아가 피고 봉숭아가 피고 능소화가 피고 연꽃이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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