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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Jan 14. 2021

쌤은 거짓말 안 해

진짜 예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선생님들께 바라는 건 딱 하나 "이대로만 해주세요."   그리고 '예쁘니'는 필수!



저는 학생들을 ‘예쁜아’라고 불러요. ‘얘야’라는 뜻이에요. 언제부터 이렇게 불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최근 몇 년은 이렇게 부르고 있어요. 왜냐하면 장점이 참 많거든요.      



이렇게 불리는 걸 아이들이 은근 좋아해요. 당연하잖아요. 예쁘다고 말하는데 누가 싫어하겠어요. 물론 한번은 불곰 같은 남자 아이가 몹시 어색했는지 “선생님 그렇게 안 부르시면 안 돼요? 이상해요.”라고 했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알 바 아니에요. 저는 고개를 갸웃하며 세상 순진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어요. “예쁜아,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예쁜아?”

좋은 말도 세 번 하면 듣기 싫다지만, 싫은 말은 한 번만 해도 듣기 싫잖아요. 잔소리 듣고 혼날 일이 많은 녀석들이니, 듣기 좋은 말로 불러주는 게 위로가 되기도 하나 봐요. 이렇게 불러줘서 좋다는 이야기가 가끔 들려와요. 저한테 직접 얘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꼭 딴 데 가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재미있는 건 제가 학기초에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예쁘나라고 부르는데 아이들은 어제 듣고 오늘 듣는 것처럼 그러려니 하더라고요. 멋쩍어하거나 신기해 하지도 않아요. 그냥 ‘들아’ 정도로 들리나 봐요.      



아주 아주 편해요. 아이들 이름을 몰라도 전혀 문제가 없어요. 무조건 예쁘니거든요. 혹시 쓸데없이 눈치 빠르고 똑똑한 아이가 “선생님, 제 이름 아세요?”라고 서든어택을 해와도 전혀 문제 없어요. 저는 세상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해요. “니가 제일 예쁜인데? 그 이름 니꺼야. 다른 이름이 더 필요하니?” 제가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수업에 들어가는 다섯 반 아이들의 이름을 두 달 정도면 다 외우거든요. 그런데 이게 유효 기간이 있어서 학년도가 바뀌면 어김없이 기억도 리셋이 되더라고요. 전년도 학생의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졸업생은 말할 것도 없죠. 그때! 예쁘나가 빛을 발한답니다. 기억 저편의 누구와 마주쳐도 걱정 없어요. “어머 예쁜아 오랜만이야.”로 다 되거든요.

지난 12월에 수능감독을 할 때였어요. 쉬는 시간이 되자 환기를 위해 급히 교실 창문을 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저를 부르더군요. 뒤돌아보니 ‘흐린 기억 속의 그대’ 한 명이 서 있었어요. ‘앗, 누구지. 언제 가르쳤던 아이지. 우리반 아이는 아닌데...’ 황급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마스크까지 하고 있으니 더더욱 모르겠더군요. 하지만 저는 환히 웃으며 침착하게 말했어요. “어머, 예쁜아. 반가워. 이 고사실에 있었던 거야?” 아이는 저를 보고 너무나 반갑다며 그동안 꼭 찾아뵙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두 번째 수능을 보러 왔다고 하더군요. 저는 수능은 원래 두 번 봐야 제맛이라며 저 역시 두 번 봤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폭풍 응원을 해줬어요. 그러고는 남은 시험도 잘 보라며 어깨를 토닥이고 돌아섰죠. 그때까지도 아이의 이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어요. 예쁘나라는 애칭이 없었다면 너무나 당황스럽고 미안했을 거예요. 결국 아이의 이름은 고사본부에 가서 서류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름을 보니 그제서야 안개가 싸악 걷히고 기억이 나더군요. 아 12반 그 아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로 비쳐지는 효과가 있어요. 뭐 굳이 사실관계를 바로잡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생각(혹은 오해, 또는 착각)은 환영합니다. 나쁠 게 없으니까요. 윈윈이죠. 저도 좋고 아이들도 좋고. 물론 저는 아이들을 사랑해요. 사랑하죠. 언제나 누구나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사해도 될 만큼은 사랑합니다요.     


 

못난이도 예뻐 보이는 효과가 있어요. 아주 조금이요. 못난이는 못나서 못난이인데, 뭐 말 한 마디로 얼마나 달리 보이겠어요? 네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역시 못난이죠.  그.러.나. 아이들에게 화가 났거나 단단히 실망을 했을 때, "예쁜아, 쌤은 말이야."라고 이야기를 꺼내면서 제 마음이 사알짝 차분해지고 화가 조오금 누그러지는 좋은 점이 있어요. 물론 극소량입니다.

하지만 못난이에게 상처를 덜 주는 효과는 꽤 있어 보여요. 아이 입장에서 비록 혼이 나더라도 꼬박 꼬박 예쁜아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 내가 잘못을 해서 혼나는 거지 ‘선생님이 나를 미워해서 혼내시는 것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예쁜아, 네가 이런 행동을 해서 선생님은 정말 놀랐어. 진짜 속상해. 내가 아는 너는 이런 행동을 할 아이가 아니거든.”하고 착한맛 양념도 살짝살짝 뿌려 넣고요. 그러면 혼나는 것과 별개로 못난이들의 요동치는 마음에 일종의 자가 치료 패치 역할을 해줍니다. 아이가 자신을 미워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제가 몰래 미워하면 되니까요. 어쨌든 이 얼마나 아름답고 생산적인 오해인가요.     

 

어서, 마법의 애칭을 찾아보세요.        

    

너무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닌, 우리반 최고 이쁜이 ㅈㅇ.






제 남편의 애칭은 ‘그 인간’이에요. 다른 어떤 말보다 이게 입에 착착 감기더라구요. 생각해 보니 이십대 때는 그를 ‘달콤이’라고 불렀었었네요. 어머나, 격세지감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군요. 아들딸의 애칭은 당연히 ‘내 사랑’입니다. 대체불가 내 사랑. (남편은 남의 아들!)


*격세지감 : [명사] 그 사람이 그 인간이 되는 것과 같이, 오래지 않은 동안에 몰라보게 변하여 아주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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