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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Jan 25. 2022

선생님 반성문

선생님으로서 느끼는 보람과 죄책감, 그 사이 어딘가 

코로나의 여파가 고스란히 느껴졌던 지난 학기 덕분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친 상태로 겨울방학을 맞았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니 긴장이 풀렸는지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힘없이 침대에 풀썩 누워 휴식을 취하려 할 찰나, 따가운 핸드폰 알림이 귓가에 울렸다.  


‘방학까지 했는데 누가 이메일을 보내는 거야!’ 


대체 이렇게 소중한 뒹굴거리는 시간을 방해하는 이메일이 뭘까. 방학의 빵바레가 울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메일이 도착했담. 궁금과 짜증이 반반씩 섞인 채로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열었다. 업무에 관련된 이메일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너무 반가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잘 지내시죠? 이제 겨울방학이고 크리스마스라 안부 전해드리고 싶어서 이멜 보내요. 고등학교 생활은 아주 잘하고 있어요. 새로운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요. 이제 점점 어려워지지만 아직까지는 사회 점수를 90%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어요. 새 학기 시작하면 농구팀에도 들어갈 거예요. 몸조심하시고 메리 크리스마스! 


작년에 가르쳤던 학생이 보낸 이메일이었다. 부족한 선생님을 기억해주고 연말 메시지까지 보낸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맙던지. 고등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말과 높은 점수를 유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번 학기 동안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스트레스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학생의 메시지를 보면서 지난 2년 동안 이 아이와 함께 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심성이 착하고 고운 아이여서 친구는 많았지만 수업시간에 쉴 틈 없이 말을 하며 종종 수업방해를 했다. 성적도 전체적으로 반 평균보다 한참 낮은 상태로 시작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떠드는 건지. 조용히 좀 하라며 종종 다그치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지 않고 계속 내 주위를 서성이며 연신 나를 불렀다. 그날따라 특히나 말을 많이 했던 터라 나도 짜증이 나서 부드러운 말투가 나오지 않았다. “왜! 선생님 왜 부르는데?” 하며 톡 쏘니 학생이 조용히 말을 한다. 


어.. 그러니까..선생님.. 음.. 저희 엄마 돌아가셨어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날 아침, 같이 사는 이모로부터 엄마 임종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들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셨던 건지, 마지막 몇 달을 앞두고 고향인 세인트 빈센트 (St.Vincent)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는 듯 덤덤하게 말을 했지만 그의 눈가는 이미 촉촉해져 있었다. 선생님한테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며 연신 눈을 깜빡이는 아이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동안 조용히 하라며 나무랐던 내 모습이 너울너울 떠오를 뿐이었다. 어느덧 나도 눈물을 글썽이며 학생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내게 얘기해줘서 고맙고 어머니 돌아가셔서 안타깝다고  조의를 표하며, 선생님한테 할 말 있으면 언제든지 꼭 말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실 이 학생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작년 선생님이 귀띔을 해 주셨지만 교우들과 하하호호 떠들며 밝게 잘 지내는 모습에 그 사실을 잊고 있던 터였다. 알고 있었는데도 학생의 수다를 수업방해 요소로만 봤다니, 내가 한 참 못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병을 마주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을까. 그 불안함이 수업 중 끊임없는 수다로 변형되어 나왔을 것인데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선생님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미안함과 죄책감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학생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이도 잘 따라주었고 그의 가디언인 이모도 함께 동참해서 수업 태도도 나날이 발전했다. 몇 개월 동안이나 지속되며 나태해지기 쉬웠던 온라인 수업에서도 그의 태도는 달랐다. 도움이 필요한 교우들을 기꺼이 자진해서 도와주었고, 온라인에서는 힘든 소그룹 활동을 할 때는 리더가 되어 내가 기댈 수 있는 학급의 롤 모델로 성장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했던 덕분에 학생은 졸업식 때 상을 2개씩이나 받게 되었다. 


상장을 받으며 자랑스러운 웃음을 보였던 학생과 이모의 말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하늘에 있는 엄마가 너무 자랑스러워할 거야.” 


운 좋게도 그의 성장을 옆에서 2년이나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고, 앞으로도 모든 학생에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기도 한 날이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언제 어디서 열매를 맺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런 다짐을 한다 해도 밀리는 업무량과 드라마틱하게 매일같이 터지는 중학생들의 문제를 상대하고 있다 보면 체력이 바닥나기 마련이다. (핑계처럼 들리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다.)


방학하기 전 마지막 날은 그런 날이었다. ‘제발 오늘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가게 해 주세요!’ 간절히 바라보았지만 신도 그날만큼은 체력이 다 떨어졌는지, 내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한 학생이 울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쟤네 둘이 저를 밀어서 넘어졌어요.” 


‘휴, 또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 터졌구나.’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학생이 가리키는 아이 둘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농구를 같이 하고 싶었는데 공을 안 빌려주길래 따라다니다가 ‘실수로’ 밀쳤다는 것이었다. 평소 학습태도가 좋았던 학생들이라 좀 놀라기는 했다. 


“실수로 밀쳤으면, 넘어진 애를 일으켜 주고, 괜찮냐고 물으며 사과해야지. 너네 그렇게 했어?” 


“아니요.” 


“이번 달 내내 ‘친절함'에 대해서 배웠잖아. 이게 친절한 행동이야? 너네가 무슨 잘못을 한지는 알지? 그럼 지금이라도 사과해.”



그제야 학생들이 뉘우치는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했다. 넘어졌던 학생이 사과를 받아들이고, 또 괜찮아 보이기도 해서 이 일은 여기서 일단락됐지만 기분이 썩 상쾌하지만은 않았다. 아마 이 아이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조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학생은 얼핏 보면 5학년으로 착각할 만큼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고,  사회성도 보통 8학년 아이들보다는 뒤떨어져 있는 아이다. 쉬는 시간에도 종종 4-5학년 학생들과 노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업시간에 기본 열 번 이상 질문을 하는데 7-8개는 대부분 수업과는 관련 없는 질문이다. 또 어느 날은 자기가 화난다고 흰 종이로 된 큰 프로젝터 보드에 유성 마커로 낙서를 해 놓기도 했다. 그걸 보고 얼마나 열불이 나던지. 그래서일까.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지 못하고 친구라고 불릴 만큼 친한 교우도 없다. 아마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에 밀치고 나서도 아무런 사과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학생이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한 달 전부터 누누이 말했던 생일이 드디어 온 것이었다. 기다렸던 자기 생일에 교우들의 축하는커녕 밀치기를 당했으니 그 마음이 어땠을까. 그 순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집에 와서 조용히 생각해 보니 그제야 학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미안함과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내 몸이 지치지 않았더라면, 마음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학생이 그 전날 종이 보드에 낙서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더라면, 좀 더 세심하게 생일을 축하해 주고 밀치는 학생들에게 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을 텐데, 그날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주기엔 내 마음이 이미 다른 것들로 꽉 차 있었다. 대체 언제쯤 모든 일을 매끄러우면서 만족스럽게 처리할 수 있을까. 



뒤 돌이 켜 보니 이것도 학교 폭력, 또는 왕따로 볼 수 있는 사건인데 내가 과연 잘 처리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테이프를 돌리듯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 내가 해야 했어야 할 것들을 나열해 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걸 어떡하나.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다고, 자책하지 말라며 자신을 토닥여보기도 하지만 이런 날은 정말 내가 별 볼 일 없어 보인다. ‘이게 네가 말한 최선이야?’ 나를 비웃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교대에서 자신이 부족한 선생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날 마인드 컨트롤하는 법을 알려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앞으로 수많은 감정과 마주하게 될 테니 마음 수련을 열심히 하시오!’라는 말을 들었다면 어려운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조금 더 수월했으려나. 



가뜩이나 센시티브 한 중학생들과 생활하는 공동체 안은 오만가지 감정이 뒤죽박죽 섞일 수밖에 없다.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대하고 싶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감정의 노예가 될 때가 있다. 내가 한없이 작아 보이는 날일수록 시간을 내서 마음을 가다듬고 명상을 하려 한다. 마음의 호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내 실수도 보이지만 간간히 잘 해왔던 내 모습도 보이니까. 



‘그래, 이런 날도 있으면 저런 날도 있는 거지. 실수를 했으면 사과하면 되고, 잘못한 것은 반성하고 짚고 넘어가면 돼.’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면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마주했던 기쁘고 보람된 순간을 일기장에 적는다. 다행히도 반짝 빛나는 옛 학생의 메시지가 호수 한가운데로 떠오르며 날 위로한다. 마음이 몽글몽글 따뜻해지는 일들을 하나둘씩 상기시키면 자책의 늪에서 빠져나와 내 실수를 객관화한다. 그럼 어렴풋이나마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보인다. 실수한 학생에게는 미안하다고 말해줘야지. 선생님이 미처 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이렇게 또 한 뼘 성장해 나가는 걸까.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할 때, 그래서 ‘선생 자격미달'이라는 딱지가 내 이마에 크게 붙어 있는 것만 같은 날, 지난날 나와 함께 울고 웃으며 성장했던 학생들을 생각하며 또다시 한번 교실 앞에 설 용기를 내본다. 부디 내 실수가 앞으로 만날 학생들에게 치명적이지 않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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