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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Aug 14. 2023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탄다면

빌 어거스트, <리스본행 야간열차>(2013)

*영화/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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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고 싶은 건 누구나 같다. 하지만 반복해야 하는 삶은 꽤 무거워서 손쉽게 벗어던질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신 누군가 가볍게 떠나는 모습을 글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보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처음 집어들 때 그런 알량한 마음이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끝날 때쯤에도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로맨스가 강화되었지만 제레미 아이언스의 연기 덕에 생동감을 얻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비틀고, 때로는 합치면서 이야기 구조를 간명하게 만들었지만 핵심 이야기는 동일했다. 영화를 메인 텍스트로 삼아, 때때로 소설과 비교하며 보았다. 영화가 생략한 그레고리우스의 전사前史는 소설에서 발췌했다. 두 텍스트가 달라질 때에는 영화를 중심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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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변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활력이 없는 언어를 사랑한다. 죽었기 때문에 확고부동하므로. 혹여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달라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흑백 텔레비전을 고집한다. 고집 때문에 아내와 다투고 끝내 헤어졌음에도, 그는 기계가 고장날 때까지 썼다. 그런 사람이어서, 그가 수업에서 실수를 했을 때에도 학생들은 자신들이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할 정도였다.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꾸어놓은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됐다."(12)


매 순간 우리는 기로岐路를 마주하고,  언제나 하나의 길을 선택한다. 이 선택의 집합을 우리는 삶이라 부른다. 이 길이 아니라 반대편이었다면 우리의 삶은 어땠을까, 매번 고민하지만 끝내 그 삶이 어떤 형태였을지는 알 도리가 없다. 오로지 우연하게 다가오는 기회 앞에서 선택하고, 책임질 뿐이다. 버티어내는 것,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회피하지 않고 다음 선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부과된 최소한의 책무다.


삶을 크게 뒤흔들 결정적 순간이 언제나 요란하진 않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60) 그의 삶을 바꾼 순간이 그랬다. 베른의 좁은 방을 떠나 강의를 나설 때만 해도 그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으리라 믿었다. 매일 지나다니는 키르헨펠트 다리 난간 위에 빨간 코트를 입은 한 여자를 보기 전까지는.


그는 뒷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감싸안은 채 다리 위로 나동그라진다. 방금 전까지 결연히 죽음을 택하려 했던 그녀는 묘하게 함께 걷기를 요청하고, 그는 별 수 없이 교실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그레고리우스의 삶에 균열이 만들어진다. 그녀가 미처 챙기지 못한 코트에서 발견한 책은 그 균열에 기꺼이 그가 동참하도록 만든다. 포르투갈 사람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문장을 사랑하는 그는 금세 그 문장들에 빠진다. (소설에서는 포르투갈어를 전혀 모르기에 번역을 하며 책에 빠져들지만, 영화는 그 설정을 빼버리고 그가 곧바로 책과 사랑에 빠지도록 만든다. 감독의 선택이 아쉽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31) 그는 자신의 삶의 나머지 부분을 경험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인다. 


"그는 57년이 지나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이제 완전히 장악하려고 한다는, 불안감과 해방감이 섞인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25)


책을 펼쳤을 때 떨어진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기차표를 집어들고 플랫폼을 서성이던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움직이는 열차에 올라탄다. 우연이라는 것을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대신, 과감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의 여행에 동참하면서, 우리 삶에 질문을 던질 기회를 얻는다.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여행에 유일한 길잡이는 낡은 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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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을 사로잡은 문장들의 주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그리하여 아마데우 드 프라두와 관련된 사람들을 하나씩 만나게 된다. 만남은 전적으로 우연에 기댄다. 우연히 방문한 안과에서 만난 마리아나의 삼촌은, 자신이 알고 싶었던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막역한 동료였다. 관객에게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으므로 이 설명은 반칙에 가깝지만, 감독은 어쨌든 우리의 삶을 굴리는 힘이 우연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묻는 듯이 무심하게 지나친다. 


마리아나 : 기억에 남는 구절이 뭐였나요?
그레고리우스 :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 연민, 매력이 가득한 감독."
마리아나 : 우연이라면 운명을 의미하나요?
그레고리우스 : 무작위적인 가능성 같아요.
마리아나 : 쉬었다 가죠. 눈 좀 붙이세요.


그의 움직임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든다. 한 때는 막역한 동지였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연인이었으나 끝내 반목하고, 총을 겨누고, 그리워하면서도 찾지 못하던 사람들. 처음에 그레고리우스가 그들을 불쑥 방문했을 때, 친절하게 반긴 사람은 드물었다. 누군가는 살라자르 독재 정권 아래에서 겪었던 잔혹한 고문 때문에 낯선 이를 경계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바쳤던 저항 운동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생동감을 잃은 오래된 기억으로 남겨두길 바랐던 사람들은 그가 반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문장만으로도 그레고리우스를 교실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동지들을 삶으로 매료시키지 못했을까? 그는 유별난 사람이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아버지가 복무하는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살았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의사가 되었지만, 부모가 원하는 만큼 유연하진 않았다. 철저한 사명감에 리스본의 도살자 멘데스를 살렸고, 그로 인해 동지의 손가락은 망가졌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를 끝내 원망하지 않았다. 


매번 육박해 오는 선택의 순간에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하나의 길을 택했고 그 결과를 책임졌다. 그가 멘데스를 구했다는 사실에 누군가는 그의 속내를 의심하고 그를 반역자라 불렀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정당한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레지스탕스에 가입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죄책감'이라고 부르며 비난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것이 살아남은 사람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것마저 외면한다면, 남은 길은 멘데스뿐이지 않겠는가?


그는 자신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이 그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아마데우 드 프라두는 언제나 죽음을 의식했기에 과감히 달라지려는 선택을 했고,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굴기에 주저한다. 


"매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완벽한 무지의 상태에서 나는 그 뒤에 아무것도 없는, 어둠조차도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을 지날 것이다. 다음번 내 발걸음은 이 벽을 지나는 걸음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소멸을 더는 느끼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서워한다면 이는 얼마나 비논리적인가."(121)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글을 때때로 꺼내어 읽고, 자신과 마주한 사람들의 증언을 조합해 인간의 조건을 성찰한다. 그가 책에 이끌려 리스본에 도착한 것처럼, 그는 아마데우의 삶에 이끌려 지금에 와 있는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가 만약 책을 사랑하지 않았다면(그는 리스본에서도 가로등 불빛에 책을 비추어 문장을 삼킨다), 그래서 우연이 주는 기회를 놓쳤다면 아마데우의 동지는 그저 서로를 원망하거나 그리워하며 쓸쓸히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삶을 바꾸는 동시에 아마데우스의 주변 인물들, 그리고 (영화에 한해서지만) 멘데스 손녀의 삶도 바꾸었다. 


아마데우가 작가로서 살기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의 남은 글을 동생이 출간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단 100권의 책 가운데 한 권이 베른의 책방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았다면... 가느다란 우연의 끈을 열고, 붙잡고, 잡아당긴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선물했다. 아마데우로 시작한 이야기는 끝내 그레고리우스라는 독자를 만나 하나의 책으로, 하나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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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영화는 독서가 만들어 낼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로맨스의 향기로 뒤덮여있지만, 독서가 만들어 낸 가능성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고 헤메는 과정은 책을 읽으며 헤매는 독자의 모습이며, 때때로 참조하는 아마데우의 문장은 길을 잃은 독자를 위한 참고문헌처럼 보인다. 영화가 독서 행위 그 자체이자, 독자에게 <언어의 연금술사>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책은 시간을 거슬러 아마데우에게 대화를 건다. 그의 문장들에 매료된 순간 두 사람 사이엔 시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채링크로스 84번지>의 한프와 도엘을 이어주던 책처럼.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난 그가, 아래와 같은 문장을 만난 후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197)


타인의 욕망에 따라 살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공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던 아마데우는, '빼앗긴 삶'을 되찾으러 길을 떠나고 그곳에서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와 달리 소설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위협할 어떤 병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암시된다. 그 역시 어디선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교실을 떠나면서,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다. 비록 짧은 시간만이 허락된다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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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태운 기차는 밤을 가른다. 어슴푸레 보이는 기차역의 불빛이 조금씩 커지고, 바퀴는 찢어지는 마찰음을 내며 서서히 천천히 구른다. 역에 머무르는 시간은 아마도 짧을 것이다. 종착지는 모른다. 누군가는 선반의 짐을 주섬주섬 내리지만, 어떤 사람은 기차와 한몸이 된듯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뛰어 내려도 넘어지지 않을 듯이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의 탑승구에 선다. 뛰어내릴 것인가, 아니면 다음 역이 있으리라 믿고 다시 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어느쪽으로든 나는 발을 떼어야 한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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