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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1930년대

제임스 Q. 위트먼, <히틀러의 모델, 미국>(2018)

by 오학준 Mar 17.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뒤늦게 제 때를 만나는 책들이 있다. 제임스 Q. 위트먼의 『히틀러의 모델, 미국: 미국의 인종법은 어떻게 나치에 영향을 미쳤는가』(노시내 옮김, 마티, 2018)이 그런 책이다. 한국에 출간된 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1기 행정부 시기였고, 절판된 후 운 좋게 구해 읽은 지금은 2기 행정부 시기다. 정부 조직 내에 남아 있던 완고한 보수파들이 저항했던 1기와 달리, 반대파들을 모두 깔끔하게 쳐낸 2기 트럼프는 거침없이 자신의 인종차별적인 정책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2018년 옮긴이의 말엔 이런 문장이 있다. "이 책에서 자세히 소개되는 바와 같이 1930년대에 나치를 비롯한 유럽의 극우들은 미국의 '앞서가던' 인종분리 정책과 인종차별적 이민법, 시민권법, 혼혈금지법 등을 살펴보며 자기들이 얻어갈 점이 무엇인지 연구했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관찰해 보면 유감스럽게도 그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185) 그 사이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총선에서 최대의 성적을 거두며 제2당의 지위를 얻어냈고, 마린 르펜은 2022년 대통령 결선 선거에 올라 41.46%를 얻었다. 극우파 조르자 멜로니는 2022년 이후 이탈리아 총리직을 사수하고 있다. 유럽 각국이 극우파의 준동으로 신음하는 동안, 트럼프는 한 번의 실패를 딛고 화려하게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그리고 미국을 예측불가능한 영역으로 이끌고 있다.


1934년 6월 초 주요 나치 법률가들이 모여 신생 제3제국의 인종주의 제도화 방편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미국인은 어떻게 했는지 묻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했다.(124)


1932년 7월 31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7대 국가의회 선거가 열렸다. 680석 가운데 230석을 얻은 나치당이 제1당에 올랐다. 89석을 얻은 공산당과 합하면 과반이었다. 어느 연정에도 참여하지 않는 당이 과반인 상태에서 정국의 불안정함은 극에 달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고 다시 치러진 제8대 총선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총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프란츠 폰 파펜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 회복을 위해 제1당의 당수인 아돌프 히틀러를 (슐라이허 대신) 총리로 임명하자고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보수파는 풋내기 정치인인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힌덴부르크는 1933년 1월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한다. 곧바로 다시 치러진 제9대 총선에서 나치당은 288석을 얻었다. 국가인민당과 합하면 과반이었다. 1928년 제5대 총선 이후 5년 만에 여당이 과반을 차지했다.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히틀러는 수권법을 발의한다. 입법부의 모든 권한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수권법은 대통령의 묵인과 야당에 대한 강력한 탄압 속에서 통과된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일당독재의 기반이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경쟁자들이 남아 있었다. 총선 과정에서 자행한 가혹한 탄압으로 사민당과 공산당 등 좌파 세력을 파괴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대신 이를 위해 손을 잡아야 했던 군부, 자본가, 지주 그리고 나치당 내부의 반히틀러 분파와의 권력 투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1934년 6월 히틀러는 돌격대, 독일 국방군 내 반대세력, 그 밖의 반나치 세력들을 숙청하는 '장검의 밤' 쿠데타를 통해 당내 반대파를 처리했고, 군부와 자본가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했다. 곧이어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대통령직까지 겸하게 되고, 당내외의 경쟁자가 완전히 사라진 1934년 8월 19일 국민투표를 통해 '퓌러'의 자리에 오른다. 서방 국가는 히틀러에 대한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지만, 10년 가까이 이어온 폴란드와의 무역 전쟁을 유화적으로 종결한 덕분에 그의 군사적 야욕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어느 정도 유예되었다.


1933년 집권을 시작으로 히틀러는 안으로는 독재 권력을 확고히 하고, 밖으로는 대외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유대인에 대한 체계적인 탄압과 차별적 정책은 내부 지지를 확고히 하는 한 수단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과도한 배상으로 인한 경제 불황, 뒤이은 대공황과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통의 배후엔 '유대인' 자본가들이 있다는 믿음이 독일에 유령처럼 번져 있었다. 나치당의 성공은 그러한 믿음을 기반으로 삼았다. 국경 너머로 유대인을 내쫓는 것, 그들이 독점하고 있는 자산을 빼앗아 독일 국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이라는 그들의 선전은 큰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제 집권 정당이 된 나치당은 이 선전을 실행에 옮겨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어떻게 유대인을 독일인의 삶의 공간으로부터 축출할 수 있을까? 무엇에 근거해서?


이 책은 1920년 나치당 강령,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 1934년 나치당의 형법개정위원회 회의 속기록을 분석해 그들이 반유대주의를 법제화하기 위해 참조했던 '선진 법안'들이 미국의 인종주의 법안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회의와 탐구의 결과로써 1935년 9월 선포된 '뉘른베르크법'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미국의 인종주의 법안들과 공명하는지도 추적한다. 저자의 주장은 도발적이다. 2차 대전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울 적이자, 그들이 축출하려 애쓴 유대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던 미국이 어떻게 나치 법학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1930년대 미국은 인종차별 국가였다. 하지만 인종차별을 하지 않은 나라가 그 당시에 있던가? 예일대학교에서 비교법을 가르치는 저자는 꼼꼼한 자료 분석을 통해 당시 독일의 법학자들이 미국의 이민법, 혼혈금지법을 얼마나 진지하게 탐구했는지를 드러낸다. 


"20세기 초 미국은 인종법에 관한 한 세계적인 선도자였다. 미국의 활발한 법 제정은 전 세계를 감탄시켰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나치는 혼자가 아니다."(46) 비록 1868년 수정헌법 14조의 정신에 따라 미국은 영토 안에서 태어난 모든 국민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지만, 어떤 국민들은 여전히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1870년대부터 흑인뿐만 아니라 아시아인, 동유럽과 남유럽 사람들에 대한 체계적인 배척이 자행되었고, 서부 개척 시대에 땅과 삶을 잃어버린 인디언들은 몇몇 보호 구역에 고립된 채 방치되었다. 히틀러가 보기에 '노르딕 혈통'을 우선시하는 미국의 인종주의적 태도는 칭찬할만했다. "벌서 1928년에 실제로 히틀러는 "홍인종 수백만을 총살해 그 수를 몇십만으로 줄였고 요즘은 얼마 안 되는 잔존 인구를 우리에 가두고 감시하는" 미국의 방침을 칭찬하는 연설을 했다."(21)


유대인을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키는 시민법, 그리고 유대인과 아리안족의 혼인이나 성관계를 범죄화 한 혈통법으로 이루어진 뉘른베르크법은 미국의 혼혈금지법(1930년대까지 존속한 케이블 법 - 미국인 여성이 외국 국적인 아시아인 남성과 결혼하면 시민권을 박탈할 수 있고 형법상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과 이민법(1924년 이민법은 1890년 인구 조사 당시 미국에 살던 각국 출신의 2% 이하로 제한했는데, 대부분은 동유럽, 남유럽, 아시아 출신의 신규 이민이 제한되었다)을 독일의 상황에 맞게 재조형한 것에 가까웠다. 적어도 1930년대까지 미국은 히틀러와 나치당이 보기에 여전히 자신들이 나아갈 역사적 방향을 선도하고 있는 국가였고, 그렇기 때문에 "잠정적이고 불확실한 친근감의 분위기"(41)에서 미국의 어두운 한 단면을 참조할 수 있었다.


이민법을 통해 외부로부터의 유입을 차단한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미국에 정착한 노예의 후손,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남북전쟁 이후 흑인에 대한 헌법 차원의 차별은 존재할 수 없었지만, 시민권의 완전한 행사를 차단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법안은 헌법과 무관하게 흑인의 삶을 통제했다. 전후 복구를 이유로, 정치적 타협을 이유로 흑인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법안들은 무리 없이 통과되었다. 문제는 누가 '흑인'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실용주의적인 법 전통 아래에서 인종주의적 판사가 누군가를 흑인이라 규정하고 그를 차별대우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미국은 의미 있는 과학적 인종 개념이 부재해도 인종주의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이념적 결의를 보여주었"(119)다. 이것은 독일인들의 흥미를 끌었다. 엄격하게 규정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차별대우하는 일이 가능한 법 전통이 독일에 도입된다면, 유대인의 정의를 엄격하게 내리지 않아도 충분히 '청소'할 수 있으므로.


느긋하고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미국식 보통법의 사법적 인종주의는 나치 판사들에게 "완전히 최적"인 "원초성"을 갖추고 있었다.(121)


뉘른베르크 법을 두고 독일의 보수적인 법학자들은 유대인 정의의 불명확성을 이유로 뉘른베르크 법의 즉각적인 도입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그들이 유대인에게 온정적이 어서라기보다, 그러한 불명료함이 곧 법질서에 가져올 불안정함이 걱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격파들에게는 그런 보수파들의 태도보다 좀 더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미국의 법 문화가 조금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1934년 6월 형법개정위원회 토론에서 양측은 미국의 다양한 인종주의적 법안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각 주마다의 차별 방식, 차별의 근거를 종합해 자료로 만들었고,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백인 우월주의를 유지하는 법적 토대를 확인했다. 이는 결국 그들의 인종주의를 정당화할 법적 체계가 된다.


20세기 초 "인종 혼합의 위협을 퇴치하려고 고안한 독특한 법적 기법들"(90-91)이 독일의 유대인 문제 해결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혼란스럽다. 심지어 인종간 혼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 조항의 경우, 나치 독일의 법학자들이 미국 인종법을 너무 '과도한 조치'라며 비난할 정도였다. "어쩌다가 나치의 눈에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을 만들어냈단 말인가?"(149) 저자는 1930년대 나치즘에 유용한 자료를 제공한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를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치즘은 과거나 미래와 아무런 연결 관계도 없이 따로 뚝 떨어진, 그저 악몽 같은 역사적 '괄호'가 아니다."(26) 물론 미국이 나치즘을 낳았다는 식의 몰이해, 미국이나 나치나 별 차이 없다는 식의 양비론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극단적인 악에 대한 물타기를 시도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책에서 지향하는 것은 "전 세계 인종주의 역사의 큰 그림 속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위치"(27)를 이해하는 것이다. 강대국으로서 인종주의 미국은 히틀러와 나치 지도자에게 미래를 예지 하는 것처럼 보였다. 


2기 트럼프 정부는 출생시민권을 폐지하겠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정당한 이민자도 추방하고, 다양성에 대한 교육에 대한 예산을 철회했다. 빼앗긴 '순수한 백인'의 우월한 위치를 회복하겠다는 트럼프 정부의 정책이 하나씩 실현될 때마다, 1930년대 '선진' 인종차별 국가였던 미국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섬뜩해진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준동하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극우파들은 또다시 과거를 반복하려는 것은 아닌가.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한 인종주의 선진국 미국이 만들어 낼 파국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일인가.


+

나치 전범들의 얼굴에 하얀 이등변 삼각형을 얹어놓은 표지는, 그들이 마치 KKK단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섬뜩한 연결, 미국의 인종주의와 독일의 인종주의 사이의 불쾌한 연결고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래에 보았던 표지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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