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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자들』에 대한 메모

부르디외, 파스롱, 『상속자들』(2025)

by 오학준 Mar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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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쓰였고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인데, 지금 나의 경험을 관통하는 그런 책들이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와 장클로드 파스롱이 쓴 『상속자들: 학생과 문화』(이상길 옮김, 후마니타스, 2025)이 바로 그 책이다. 1960년대 프랑스의 고등교육의 불평등 문제를 다룬 책인데, 40-50년 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내가 느꼈던 미묘한 불편함, 불안함, 공포, 언짢음, 두려움들의 사회적 근원들을 더듬어보게 만든다. 어렴풋이 느끼던 감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적인 언어들을, 반 세기 전의 책으로부터 얻는다. 정리된 글을 쓸만큼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어서, 조만간 할 책모임을 위해 할 말들을 기억하고자 메모의 형태로나마 남겨둔다.


저자들은 묻는다. 대학은 계급 불평등을 재생산하는가? 그렇다. 심지어 형식적으로 기회의 평등이 확대되고 있던 1960년대 프랑스의 상황에서도. 특권 계급의 전유물이었던 고등교육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는, 대학교 입학의 저변을 확대하고 입학 과정에서 차별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의 '개혁'으로 전화했다. 더 이상 신분이나 친분이 고등교육을 받을 자격을 결정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참여할 수 있는 전국적 단위의 시험을 통해 오로지 '능력'에 따라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다. (프랑스는 68 혁명 이후 국공립대 공동학위제를 통해 대학 평준화를 시도하였다. 동시에 그랑제꼴이라는 별도의 엘리트 대학으로 그 평준화를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한데, 이 '능력'이란 정말로 공평한가?


능력은 정말로 자연적 소여인가? 무엇이 '능력'인지는 누가 정하는가? 어떤 이의 기술이나 소질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능력으로서 규정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가령 조선시대에 글씨를 잘 쓰는 소질을 지니는 것은 사대부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 중 하나로 여겨졌겠지만, 오늘날 공무원 가운데 글씨 쓰는 소질이 중요한 건 필경사 두 명 정도에게만 해당한다.) 능력을 규정하는 힘, 그렇게 규정된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힘은 종종 은폐된다. 하지만 그러한 힘들은 특정한 계급 출신의 아이들이 능력을 자연적으로 부여된 무언가로 합리화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다. 학교가 은밀한 방식으로 학교 이전의 배움 (대부분은 가족으로부터 왔을)의 영향력을 학교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한, 학교는 불평등한 계급의 재생산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 하층 계급의 자녀들은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 자체도 적지만, 고등교육 과정에서 택하게 되는 전공에 있어서도 일정한 제약에 시달린다. 학업에 온전히 매진할 수 없는 가정환경에 놓인 이들은 쉽사리 학업 성취에 있어서도 부진과 지체에 시달린다. 또한 주변에 비슷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적은 하층 계급의 자녀들은 고등교육에 대해 '자신과 무관한 것' 혹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이라는 체념적인 주변의 반응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라는 핸디캡을 지닌다.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디디에 에리봉이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중등교육에 대한 혐오 섞인 말들을 들으며 자기가 속한 계급으로부터 축출되는 감정에 시달렸음을 고백하는 부분도 참조해 볼 만하다.) 반대로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서 온몸으로 기대를 받으며 자라는 것 역시 일종의 핸디캡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누구도 자신의 학업 성취에 대해 제대로 지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린 채로 살아온 이의 선택지란 얼마나 좁겠는가.


한국도 비슷하겠지만, 프랑스에서도 평균적으로 비싼 학비를 자랑하는 의대, 법대를 선뜻 지망할 만큼 (특히나 알바 없이) 가정에 여유가 있지 않은 계급의 자녀들은 인문대를 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어떤 부유 계층의 자녀들에겐 인문대가 '망명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렇기에 일괄적으로 인문대가 하층 계급의 유일한 선택지처럼 여겨질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극심한 문화적 불이익을 겪은 주체들[즉 최하층계급 출신 학생들]이 가장 큰 불이익을 겪는 곳은 불이익의 작용으로 그들이 추방당해 내몰린 바로 그곳[즉 인문대]이라는 점이다."(22) 실제로 나 역시 처음 대학교에 들어가서 느꼈던 문화적 격차들에 당황했는데, 바로 인문대야말로 그러한 문화적 격차들이 학업 성취에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그러한 문화적 소양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쩌면 학교에 들어온 순간부터 패배하여 밀려날 수 있다는 강한 불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막연한 불안감만은 아니었다. 


두 저자는 경제적 격차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가 불평등의 중요 요인임을 지적한다. 이 문화적 차이는 사회적 조건의 차이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는 것이기에 하층 계급의 자녀가 하루아침에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 알고 있는 예술가나 학자의 정도, 들어보았던 음악이나 보러 간 미술 작품의 수, 읽었던 책 등 '평등' 속에서 드러낼 수 있는 '차별'의 기호들은 산재한다. 형식적인 평등은 이러한 차별을 차별로서 받아들이기보다 개인적 노력의 차이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너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만큼 알 수 있어!"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자기 방에 전축을 놓고 클래식 음악을 들어온 친구와, CDP조차 사지 못해서 음악은 오로지 TV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던 나 사이에 '현대 음악의 이해' 성적이 갈리는 것을 어떻게 개인의 노력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몇몇은 그러한 격차를 순식간에 따라잡기도 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존재들이야말로 일반적인 격차를 승인하게 만든다.


"훨씬 현실적인 직업 기획에 내몰리는 하층계급 출신 학생은 딜레탕티슴에 결코 온전히 투신할 수 없으며, 공부의 간헐적인 매력에 빠져들 수도 없다."(135) 게다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학생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확실한 벌이가 보장되는 직업과 연계된 전공을 '선호'와 무관하게 골라야 했다. 그들에게 있어 딜레탕티즘 - 그리고 그것의 연장선상으로서 성적이나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 다양한 학교 내 조직, 학생회 활동, 토론 등은 사치스러운 행위였다. 그리고 그러한 아이들의 과묵함은 때때로 사회성의 부족, 사회적 의식의 부족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물론 자신의 존재 조건과 무관하게, 혹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 냉철한 시각을 견지하고 사회 운동에 투신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무관심을 덮어놓고 옹호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학교 수업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딜레탕트로 대표되는 경쾌함, 세련됨, 우아함과 같은 엘리트의 기호 속에서 학생으로서 나는 이러한 격차를 승인하고 따라잡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게 된다. 단순히 선행학습을 통해서 이루어낼 수 없는 "부모의 서가를 통해 자극받고 승인받은 독서, 자신이 고를 필요 없이 [부모에 힘입어] 엄선된 공연, 문화적 순례나 다름없는 여행, 이미 깨친 자들만을 일깨울 수 있는 암시적 대화들"(47)은 격차의 재생산의 수단들이다. 그것을 모른 채 입학한 나와 같은 프롤레타리아트 부모 출신의 자녀들은 "학업 과정 내내 '자기도 모르는 것'에 관해, 고전에 대한 은근한 열정에 관해, 또는 좋은 취향의 무한하고 미세한 뉘앙스에 관해 어쩔 수 없이 가식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아야만 한다."(47-48) 그것이 학교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어떤 의무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기꺼운 의무다. 왜냐하면 계급적 기대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더 위로 갈 수 있다는 기대는 문화적 구별 짓기에 대한 승인과 그렇게 구별된 '문화적' 가치들의 추구로 이어진다. 물론 몇몇 경우에는 성공적으로 따라잡은 것처럼 보였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아득한 격차를 확인하는 쓰라린 패배들을 겪도록 했다. 그 열등감이 학창시절,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꽤 오래도록 나를 짓누르고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들은 말한다. "교육체계는 그 고유한 내적 논리의 작용만으로도 특권의 영속화를 보장할 수 있다."(59) 체계적인 배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영속적인 구분을 정당화시킨다.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믿음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압력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믿음)으로 인해 시스템에서 살아남는다. 디디에 에리봉이 그러했듯이, 자신을 미세하지만 체계적으로 좌절시키는 교육 시스템에 대한 무지가 그의 열정과 야망에 불을 지폈고 - 대부분은 냉소하며 떠나간다 - 그는 아니지만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자수성가' 신화의 열정적인 전도사가 된다. 살아남았으므로, 그들은 능력을 신봉한다. 능력의 사회적 근원들은 은폐된다.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이 실현되면 학교 체계는 온갖 정당성의 외양을 이용해 특권을 정당화할 수 있다"(60). 


1장에서 학교의 노골적인 불평등 재생산 기제에 대해 설명한다면, 2장과 3장에서는 학생에 대한 '이념형'을 이야기한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모든 학생들에게 어떤 능동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는 건 아니다. "대학생들이 하나의 동질적이고 독립적이며 통합된 사회집단을 구성한다는 점을 의심하도록 이끈다."(77) 그렇다고 학생들이 자신의 출신 계급이나 조건으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변화의 과정 속에 위치시키고 자기를 규정하는 조건을 넘어서기를 의식적으로 욕망하는 존재로서 자기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젠가 학생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이 되어야 하는 존재라 생각하고, 학생으로서 자신은 임시적이기에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덕목이라는 생각을 공유한다. 그들은 스승을 찾고, 자신을 지적으로 성숙시킬 자극들을 찾는다. 교육은 학생들이 그러한 욕구를 성공적으로 장착하도록 자극한다. "학업을 수행하는 현재를 자율화함으로써 학생들은 지적인 소명을 온전히 살아내고 있다는 환영에 사로잡힌다." (95)


그 점에서 파리의 인문대생이 '신참 지식인으로서의 대학생에 대한 이념형적 이미지'를 제공한다. 특권을 겹겹이 누리면서도 동시에 학업에 대해 경쾌함이나 초연함을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은 그렇기에 정치적으로도 대담하다. 사람들은 그러한 태도로부터 그들에게 지적인 기량이 있음을 유추한다. "인문 계열 전공들이 제고하고 영속화하는 문화에 대한 전통적 관계가 파리 거주 덕분에 용이해지는 지식 세계와의 긴밀한 접촉, 유복한 사회적 출신이 허용하는 위험 없는 자유와 결합한다."(109) 디디에 에리봉이 자신의 부모와 고향에서 '좌파'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할 때, 어떤 복잡한 이념이나 섬세한 개념 구별이 있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노동자라면 응원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부분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파리(혹은 서울이어도 상관없다)의 대학생들이 펼치는 난해한 마르크스주의 이념 논쟁을 그에 맞대어 보자. 급진성이나 섬세함이란 어떤 면에서 출신을 가르는 선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이념형으로서의 파리 출신-인문대생-남성이라는 주체화 형식을 제공하는 부분(110)에 이르면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2009)에서 진정성 레짐을 분석하는 부분을 떠올리게 만든다. 모든 대학생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특정한 주체화 형식은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심지어 그 수가 소수라 하더라도.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지원자들의 형식적 평등을 완벽하게 보장하지만, 문화 앞에서의 실질적인 불평등에 대한 고려는 익명성을 통해 배제"(148-149)하는 교육 체계는 자신들의 차별주의를 숨기면서도, 차별을 통한 이득은 남기려는 이들의 '공정성' 요구와 공명한다. 한 발 나아간 것인지도 모르지만, 형식적 평등과 능력주의에 대한 숭배, 개인주의로 점철된 오늘날의 교육 체계는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은밀한 차별을 추구하려는 젊은 세대를 생산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신동에 대한 사회적 경탄은 문화적 특권을 개인적 재능이나 인격적 실력으로 둔갑시키는 "계급 인종주의"(154)가 사회에 만연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영재발굴단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해 볼 수도 있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급적 격차가 부모 개인의 노력으로 환원되거나 아이들의 두뇌 문제로 환원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학교는 이러한 경향에 저항해 "가장 박탈당한 상태에 있는 계급이 사유 기술과 습성을 습득할 수 있도록 그럴 수 있는 곳, 즉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160)을 통해 사회의 실질적 민주화를 위한 장치로서 재발명되어야 한다. 교육 체계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배제되지만, 역설적으로 교육에 가장 많은 기대와 요구를 하는 하층 계급 출신의 학생들을 위해서. 교육 과정 내내 개입하는 문화적 불평등의 요인들을 체계적으로 중화시키는 "합리적 페다고지"(166)를 요구하는 문장은, 오늘날 정 반대로 교육의 전 과정에 불평등한 사회적 조건들을 어떻게든 밀어 넣으려는 이 나라의 오늘에 가장 필요한 문장처럼 보인다. 


학교를 다니며 느꼈던 '엇나가는' 기분들의 사회적 근원이 이와 같은 '문화적 구별 짓기'에 있다면, 방송국이라는 나의 일터에서 느끼는 이 미묘한 '엇나가는' 기분들은 어떤 사회적 근원을 지니고 있을까? 두 가지 질문이 연달아 떠오른다. 하나는 비교적 동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사회적, 문화적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소위 '프롤레타리아' 계층 출신의 노동자와 중상류층 출신의 노동자 사이에서의 갈등과 구분 짓기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다른 하나는 그러한 갈등과 분열은 미디어 기업의 상품생산물인 '프로그램'에 어떻게 반영되거나, 갈등을 역으로 구성할까? 그리고 그렇게 대중에게 소비되는 프로그램은 어떤 식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갈까? (뒤로 갈수록 답 없는 질문이긴 하다) 이 독특한 기업 - 사람들의 감각, 인식, 행동,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 - 의 노동자들의 구성과 생산물의 형태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을까? 왠지 회사를 빠르게 떠나서 제대로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일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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