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젤 샤피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2025)
지젤 샤피로의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원은영 옮김, 이음, 2025)를 읽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차별과 혐오를 공공연하게 표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우리가 즐기는 일이 가능한가? 혹은 한 때는 별 문제없는 표현이나 사상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수용된 공간이 달라지면서 차별과 혐오의 단면이 드러난 작품을 즐기는 일은 가능한가? 작가로부터든 시대로부터든 '배신'당한 작품을 우리가 즐기는 일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디까지인가?
오래된 작품들이 새로운 '기대 지평' 앞에서 낱낱이 해부당하고, 공공연히 문제적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작가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오늘날 우리는 어떤 작품을 어디까지 즐길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근대 이후 제기된 해묵은 문제,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대해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그 둘은 분리할 수 있는가?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다만 아쉽게도 이 책에서 "작가의 소행과 관계없이 작품 자체가 책망의 대상이 되는 경우"(214)는 섬세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1장은 작가와 작품의 '동일시'의 세 관계를 탐색하는 이론적 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작가와 작품의 동일시는 세 가지 관계에 따라 이해될 수 있다. 환유 관계, 유사 관계, 내적 인과 관계. 하지만 이 모든 동일시는 1) 작가 본인의 전략 자체에서 기인하는 한계와 2) 문화 매개자의 전략 및 작품 수용에서 기인하는 한계에 직면한다.(39) 그리하여 완벽한 동일시도, 혹은 완벽한 분리도 불가능한 애매한 관계에 놓인다.
환유 관계란 "작가의 이름이 작품의 저자 각각을 지칭하기 위한 축약으로서 기능"(53)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 '인식론적 단절'을 일으키며 하나의 일관된 이름 아래에 작품들을 꿰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고(종종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 사이의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거나 이념적 변화가 나타나는 작가들을 떠올려보라. 무엇이 작가의 '진짜' 작품인가?), 작가의 전략을 파괴하는 '미완성' 원고들이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출판되어 일관성을 파괴하는 경우도 있다.
유사 관계란 "작품은 작가라는 사람의 발현"(59)이기에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을 작가와 작가를 둘러싼 현실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가령 자서전 형식을 빌린 작품에서 독자는 작중 화자와 저자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저자의 경험은 작중 화자의 경험과 어느 정도 공명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종종 거리 두기 전략을 통해 화자와 저자를 분리하여 형사적 책임을 회피하기도 하며 심지어 허구적 분신을 창조해 화자의 발언으로부터 저자 자신을 방어해 낸다.
내적 인과 관계는 작품을 "의도가 객체화된 증거"(79)로 이해하는 것이다. 작가의 특정한 의도가 물리적 실체로 표현된 것이 작품이라면, 작가와 작품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 생산물을 개인의 궤적과, 규칙과 고유의 내기물을 가지고 있는 장이 만난 결과"(78)로 이해한다면 작품의 주체는 개인이라기보다 장 전체다.(게다가 애초에 작품에 대한 저작권 요구는 작품 이용에 대한 독점을 요구하던 문화 매개자들의 주장에서부터 시작했다. 데이비드 벨로스와 알렉상드르 몬터규의 『이 문장은 누구의 것인가』(이영아 옮김, 현암사, 2024)에 저작권 개념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또한 작가의 표현이 의도하지 않은 수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 작가의 '의도'는 작품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세 가지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작품과 작가의 동일시는 완벽하지 않으며, 때때로 작가의 전략적 측면에서든 수용의 단계에서든 균열이 벌어지기에 반드시 사례별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2장에서 '문제적' 작가들의 사례를 일별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배신'의 사례들을 범주화하여 각각 별도의 답변을 내려보고자 한다. 작품의 도덕성까지 의심하게 만든 스캔들을 일으킨 작가들, 로만 폴란스키, 모리스 블랑쇼, 페터 한트케 등의 작가들이 여기 소환된다.
로만 폴란스키의 경우는 작가와 작품 사이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는 1977년 미성년자와의 불법적 성관계로 수감된 후, 가석방 상태에서 도주해 지금까지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 있다. 그가 2020년 프랑스의 영화상인 세자르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자, 프랑스의 배우 아델 에넬은 '수치스럽다'라고 외치며 퇴장하기도 했다. 일각에서 아델 에넬을 향해 '검열'을 시도한다는 비판을 제기했지만, 지젤 샤피로는 그녀의 주장은 영화계의 '공인'에 대한 항의였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공인은 "매우 어린 여성을 피해자로 만드는 권력 남용을 눈감아 주는 시스템을 영속시키는 데 기여"(100)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폴란스키는 자신의 영화(<장교와 스파이>)를 자신의 처지와 결부시킨다. 부당한 유죄 판결을 받은 한 무고한 사람의 재판 이야기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전략이다. 이를 공인하는 것은 "작가들의 권위에 의한 남용을 은폐하고 심지어 그 작가들을 '저주받은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남용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108).
모리스 블랑쇼, 귄터 그라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는 과거의 현실 참여를 은폐했다가 폭로당했다. 전후 좌파 진영에서 활동했던 모리스 블랑쇼는 1930년대 극우 신문에 기고문을 투고했던 사실이 드러났고, 귄터 그라스는 2차 대전 말기 무장친위대에 복무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뒤늦게 사실을 고백했다. 문학 이론가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역시 무장친위대에 자진 입대했는데, 그는 공개적인 폭로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작가들의 숨겨진 행위가 폭로된 후, 그들의 작품은 달리 평가받아야 할까? 그러니까 그들의 작품은 숨겨진 작가의 행위와 연결되는가? 저자는 직접적,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을 수 있지만 "저작은 삶의 일부를 이루며, 그것이 저자의 윤리-정치적 성향을 표현할 때는 개념적 형식화나 미학화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완곡화 되거나 승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170)고 지적한다. 그것은 작품에 대한 비평과 분석을 통해 적절하게 드러날 수 있기에 사려 깊은 접근을 필요로 한다.
페터 한트케의 경우는 앞서와 결을 달리한다. 『관객모독』의 저자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페터 한트케는 2006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등 유고슬라비아 내전 과정에서 자행한 집단 학살, 반인도적 범죄, 전쟁 범죄 등의 혐의로 기소된 그는 재판이 진행되던 2006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그런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페터 한트케의 과거 저작과 맞물려 전쟁범죄에 대한 옹호를 표명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집단 학살에 대해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여 부인주의(학살은 일어난 적이 없거나 과대평가되었다)를 드러냈다는 혐의를 받았다. 저자는 한트케가 세르비아의 시선을 우선시한다는 정당한 비난은 수용할 수 있지만 그의 표현이 "정확성이라는 윤리에 충실"(187)하려 한 결과이며, "시적 기법을 공론 속 도발적인 발언의 형태로 옮긴 것이 사람들이 유감스럽게 여길 만한 모호함을 품고 있다는 점만으로 그 작품의 자격을 박탈할 수는 없다."(195)고 본다.
독자의 입장에서 저자가 각각의 범주화된 사례에 내리는 결론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저자는 "수긍할 만한 해석의 경계를 정하는 기능이 작품에 대한 토론과 논평에 있"(197) 다는 자신의 주장을 끈기 있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의 해석에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나름의 독해를 해내고 그 근거를 공론장에 내던질 용기와 책무를 지녀야 한다.
책 말미에도 짧게 언급되지만 작가가 작품을 온전하게 소유한다는 권리엔 집단 예술의 분업 과정에 대한 은폐가 기초한다. 작가의 문장이 곧바로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거기엔 편집자, 인쇄노동자, 안무가, 연출자, 스턴트맨, 세트 노동자, 수많은 단역 배우의 노력이 덧붙여져야 한다. 작품을 작가가 온전히 전유하는 것은 18세기의 출판 저작권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의 이론적-경제적 개입에 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 노동으로서의 예술은 여전히 작품-작가의 일의적인 연결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이것은 일종의 작가 신성화이자 생산물에 대한 불공평한 이익의 독점을 낳는다. 책의 전체적 맥락에서 어긋나 있기 때문에 부록으로 빠진 것이겠지만, 작가에게 모든 공과 책임을 돌리는 시스템에 대한 재검토 - 누군가를 공인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온전한 권리를 작가에게 귀속시키는 상징적 행위를 반복할 것인가? - 도 별도의 고민 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작품과 작가의 관계를 고민하게 만드는 스캔들에 대한 토론과 비평을 공론화하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관계 설명을 내놓을 책무가 "작품 창작자와 관객, 독자, 청중 사이를 매개하며 창작물과 창작자의 경제적, 상징적 가치 생산에 참여하는 문화 매개자들"(15)에게 있다고 본다. 성급하게 판결을 내리는 대신, 자신과 같은 문화 매개자들의 책임을 다하려 한다. 나는 이것이 단지 소위 '문학계'나 '예술계'에 속하는 사람과 기관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상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영향을 미쳐 특정한 행동을 유발하려는 욕망을 지닌 모든 인플루언서(꼭 틱톡이나 유튜브를 하는 사람 들 뿐만은 아니다)들에게도 요구되는 책무라는 생각을 한다. 저자도, 번역자도 모두 '문화 매개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캔슬컬처의 시작과 끝에 있는 것은 소비자주의로 무장한 이들일 것이므로.
결국 이 책을 읽고 나니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노지양 옮김, 을유문화사, 2024)까지 읽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정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 즉 괴물이 만든 예술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픽션인데 두 책이 서로 보충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