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에핀국화 Dec 04. 2023

칭찬하지 못하는 엄마

당당한 발걸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엄마, 나 국어 수행 잘 본 거 같아

빙긋 웃어주며 H가 한 말을 되돌려준다.

국어 수행 잘 본 거 같아?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쌀을 씻는다.

아침에 저녁밥 쌀을 미리 씻어두지 못한 탓이다. 한 시간 후 줌 수업도 잡혀 있다. 수강생이 아닌 강사로 말이다.

여유롭게 수업 내용 살펴보며 향긋한 커피 한잔과 나만의 사무실 책상을 꿈꾸지만 현실은 아이들 공부방 구석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이 내  강의 장소이다.

향긋한 커피와 여유는 개나  줘버리고 xx 년처럼 정신없이 밥을 하고 상을 차

엄마를 향해 어제의 그 당당한 발걸음과 자신감 넘치는 중딩 H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나 국어 수행 100점 맞았어~

오~~ 비법이 뭐야? 엄마 좀 가르쳐줘~


짧은 한마디 남기고 반찬을  나르며 돌아선 발걸음에 쿵 하고 부딪힌다.

H가 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차리고 먹고 치우고 60분 안에 클리어해야 하는데 이 자식은 어미맘도 모르고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키는 나보다 훌쩍 커버린 아이가 엄마의 칭찬이 좀 더 듣고 싶어 주위를 맴도는 가보다.


우리 집은 칭찬에 인색하다.

과도한 기대를 받고 자란 남편 덕에 우리 집에서 결과에 대한 칭찬은 금기시된다.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한 혹은 칭찬을 듣기 위한 공부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긴 하나 아직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칭찬과 격려 없이 어찌 많은 성취를 이뤄 낼 수 있는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자식 칭찬 할 때 남편 눈치 보는 사람은 구상에 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대신 내가 찾아낸 말

애썼네. 수고했어. 축하해 등이다. 엄마의 칭찬이 성에 안 찬 아이가 강력한 한방을 날리다.


우리 반에서 나만 100점이야!!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남과 비교하여 제 잘난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인가 보다.

아이의 강력한 한방에 얼굴전체에 웃음이 번지는 걸 슬며시 부여잡고 대단하다는 말을 다소 차분한 말투로

건넨다.

대신 그 상황을 즐기도록 질문을 했다.

"어떻게 너만 100점인걸 알았어?"

"원래 안 물어보는데 샘이 100점 맞은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해서 들었더니 나 혼자였어.

애들이 나한테 재수 없다 또 다 맞았냐 블라블라 블라..."

신나게 이야기하는 아이를 돌아봤다.

슬쩍 비치는 입가에 웃음기를 살짝 머금고, 한껏 뽐내고 싶은데 절제하는 아이를 보니 가슴 한쪽이 답답한 건 아닌데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왔다.

시끌벅적하게 축하와 칭찬의 말을 건네고 치킨을 시켜줘도 모자랄 판에(우리 친정집은 그랬다)

왜 아이의 성취를 맘껏 칭찬하면 안 되는지 다시 한번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남편에게 화가 났다.

당신과 이 아이는 엄연히 다른 존재인데 과하게 자신을 닮은 아이를 보며  아이의 생각을 이미 다 아는냥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래!! 라며 단정 짓는 말들을 자주 한다.

그러면서 본인이 칭찬받기 위해 공부했던 과거와 아직도 화해하지 못한 채 지난날을 후회하며 아이게 칭찬을 하지 않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은 자기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안다.

무엇이든 스스로 필요하다고 여길 때 시작하게 하려면 우리가 칭찬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부모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의 삶을 낭비하지  않길 바라며...




남편은 칭찬의 역습이라는 말을 매우 좋아한다.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주장들이다. 과도한 칭찬은 여러모로 독이 될 수 있지만 적절한 칭찬과 격려는 아이의 성장에 윤활유가 되어 준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 부부는 아이들 교육에 있어 의견충돌이 있다.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여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니 계속 만나는 지점이 없다.

칭찬을 하네 마네와 비슷한 또 다른 하나의 주된 논제는 아이를 믿어준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가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믿어 주어야 한다는 내 주장과

믿을 만한 행동을 해야 믿지 자기가 한 행동은 생각도 안 하고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느냐고 말하는 게 말이 되냐는 게 남편의 주장이다.


나에게 아이를 믿어주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지금 아이의 모습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고 믿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느냐고 물어본다면

이 아이가 한 개인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해 사회에서 인정받는 가치를 창출해 내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걸 믿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아이의 평소 행동과 말에 신뢰가 가면 믿어주고 그렇지 않다면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말을 한다.


수많은 밤

'아 말이 안 통해'라는 생각과 긴 한숨 한번 내쉬고 우리는 등을 돌려 누웠다.


이꽃님 작가의 죽이고 싶은 아이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주인공 아이가 친구를 죽이지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자 아이는 잃어버린 기억으로 인해 내가 정말 친구를 죽였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의 수상했던 행동과 주위의 증언 모든 정황이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는 이 아이는

결코 친구를 죽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을 믿어주는 한 사람이 없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내가 친구를 죽였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존재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성장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내가 멍청한 짓을 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사람이 부모여야 하지 않을까?




이 싸움에서 남편에게 절대로 지지 않을 생각이다.

아무리 뜯어봐도 남편의 주장을 온전히 납득할 수 없고 그렇게 아이들을 기르고 싶지 않다.

각자 자기 스타일로 양육하자고 할 수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치관은 같다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인생의 중요한 가치와 내가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가 일치한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자녀가 부모를 기분 좋게 하려는 태도는 연약한 아이에게 어쩌면 생존본능이다.

그것이 공부가 아니라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은 부모가 기대하고 바라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 들이다.

어린 시절 공부 욕심 많은 집안에서 장남으로 가족들의 온 기대를 받으며 자란 남편의 학창 시절은

아마도 회색빛이었나 보다.

올백 아니면 엄마한테 혼날 줄 알으라는 말을 듣고 학교에 가던 아이

엄마와 아빠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과외시켜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공부욕심 있다면서 엄마가 좋아하겠지?)라는 말을 했다는 아이

가끔 불안했다는 아이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 부모의 칭찬을 바라며 했던 자신의 모든 행동을 부정하며 내 아이에게는 칭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나 보다.


남편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수행평가 100점 맞았다고 자랑하면 깔깔거리며 시끌벅적하게 축하해 주고 칭찬도 마음껏 하면서 치킨 시켜 먹으면 안 될까?




작가의 이전글 사려 깊은 피우다 대표의 어느 평범한 가을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