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먹기에 따라

마음이 이끄는 대로

by 타조

원효는 쏟아지는 구역질을 멈췄다. 어둠이 걷힌 자리에는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해골이 놓여 있었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그보다 더 거대한 진실이 떠올랐다. 어젯밤의 달콤함은 환상이었는가, 아니면 지금의 역겨움이 착각인가. 사유는 벼락처럼 그의 전신을 관통했다. 대상은 변하지 않았으되 오직 바라보는 마음의 무늬가 변했을 뿐이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세계란 거대한 거울이며, 우리가 보는 모든 풍경은 결국 내면의 투영임을. 그는 바루를 챙겨 들고 거침없이 유학의 길에서 되돌아섰다. 이미 그의 마음 안에 만 리 길 너머의 진리가 당도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원효 대사의 일화 중>




661년, 신라의 고승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비바람을 피해 들어간 어느 토굴에서 잠이 깬 원효는 극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우연히 잡힌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셨다. 그 물은 세상 어느 음료보다 달콤하고 시원했다. 원효는 깊은 만족감 속에서 다시 잠들었다. 아침이 되어 깨어보니 자신이 마신 것은 바가지가 아닌 썩은 해골에 고인 빗물이었고, 그 안에는 벌레가 들끓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원효는 심한 구토를 일으켰다. 같은 대상을 두고 '어젯밤의 물과 오늘의 물은 같은 것인데, 왜 어제는 달콤했고 오늘은 역겨운가?'라는 질문을 던졌으며, 답은 외부에 있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마음이 생겨나므로 갖가지 법(현상)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해골과 바가지가 다르지 않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이미 신라에서 최고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칭송받던 원효는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 깨달음을 얻으려 부단히 노력하면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지만 여정 중의 경험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의 깨달음은 단지 불교적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당시 수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쳤고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원효라는 당시 최고의 지성을 갖춘 인물이기에 가능한 깨달음이 아니었고 누군가 질문한다면 나는 그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두개골에 고여 벌레가 들끓는 충격적인 물에 대한 경험과 차이는 있지만 분명 우리도 같은 경험을 수없이 반복한다. 더불어 직접 경험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그의 깨달음에 공감할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다양하고 삶 속에는 저마다의 지혜가 존재한다. 삶의 지혜는 지식과 경험의 양보다 질 쪽에 더 가깝다. 사색과 사유의 과정을 통해 지식과 경험이 지혜로 발전하고 쌓이기 때문에 자기 시간을 사색과 사유에 할애하지 않으면 지혜를 쌓을 수도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위고하라는 화려한 옷이나 누더기를 걸치고 무대 위에 선다. 높은 자는 아래를 굽어보며 오만해지고, 낮은 자는 위를 우러러보며 비굴해지곤 한다. 그러나 원효가 마신 해골물 앞에서 그 옷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갈증 앞에는 왕의 목마름과 노비의 목마름이 다르지 않으며, 죽음 앞에는 금잔의 향유와 해골의 빗물이 다르지 않다. 지위고하란 결국 마음이 만들어낸 덧없는 환영일 뿐이며 깨달음의 높고 낮음이 있을 따름이다.


발전하는 과학 문명 시대에서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여유를 누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여유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미 평준화되어 버린 여유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동시에 여유를 소모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에게는 고독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여유를 고독으로 채울 수 있어야 깨달음을 얻고 진정한 행복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원효, 617-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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