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태어났을까
어렸을 때 특기와 장점을 써내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에 일을 그만두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내가 잘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전공? 취미로 하는 것들? 나의 취미는 무엇이고 나의 전공은 정말 내가 잘 하는 것일까.
나는 지금 내 전공으로 업을 삼아 사는 사람도 아닐 뿐더러 취미라고는 음악듣는 것. 친구들과 술 한잔하며 이야기하는 것. 책 보는 것 정도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던 나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느라 나를 돌보지 못한 탓일까.
진정으로 원했던 삶은 무엇일까,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아온 것일까.
1991년 홍제동 동산한의원. 자칫하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던 나를 살려준 곳.
엄마가 나를 임신하고 진단을 받으러 간 곳인데 200% 남자아이라고 했단다. (그 당시에는 성별을 알려주곤했다) 내 위로 이미 언니가 한명 있었기에 둘째는 무조건 아들을 바라는 한 사람이 있었다.
홀어머니의 큰아들. 우리아빠 얘기다.
워낙 보수적이고 남아선호사상이 심한 친할머니때문에 난 이 세상에 나오지도 못할뻔 했다.
그렇게 낳을 때 까지 모든 집안 식구들이 나를 남자아이로 알고 배냇 저고리도 다 파란색으로 사뒀다고 했다.
근데 정말 신기한건 엄마는 여자아이라는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둘째딸로 태어났다.
엄마는 미용사였고 아빠는 양복점집 사장님이였는데 나를 낳을 때 쯤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우리 네 식구는 미용실에 딸린 단칸방에 살아야했다. 불광동 독박골이라는 산동네 였는데, 엄마아빠는 제일 힘든 시기여서 잊고 싶다 하지만 내 인생을 통틀어 그때의 추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엄마는 미용실을 운영하셨고 아빠는 명품수선집에 취직을 했었다.
나와 언니는 언덕 밑 동산교회 선교원에 함께 다녔다.
교회를 마치면 그 근처 슈퍼에서 100원짜리 종이인형을 샀다. B4정도 크기에 인형들이 가득했는데 일일이 가위로 잘라야했다. 잘려져 있는건 300원이라 차마 사지 못했다. 그게 어찌나 갖고 싶던지.
메로나는 100원, 더위사냥은 300원. 이도 마찬가지로 매일 메로나만 사먹고 더위사냥은 아주 가끔 엄마의 심부름을 이행하면 사주시곤 했다. 그 심부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금으로선 정말 옛날 얘기 같은거라.
교회 앞 쌀집에서 보리를 팔았는데 내 키만한 절구통에 가득 들어있는 보리를 네모난 되로 얼마씩 팔곤했다.
집에 돌아와선 끽끽 소리가 나는 동그란 레버가 달린 TV로 모래시계를 보곤 했다. 조금 보고 있으면 피자호빵을 사온 아빠가 헐레벌떡 들어와서 옷도 벗지 않은채 네식구가 함께 드라마를 봤던 기억이 있다.
아빠가 피자호빵, 바게뜨, 전기구이통닭을 사온 날은 월급날이다.
노오란색 봉투를 가슴에 품고 입김을 호호 불며 들어오던 아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곳 단칸방은 밤에는 쥐가 천장을 돌아다니는 소리에 잠을 못이루고 더러운 화장실 때문에 교회로 볼일을 보러 가기도 했다. 나는 너무 어렸기에 불편한 것도 모르고 살았지만 부모님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성인이 되고 난 후에야 이해가 된다. 거기선 6살 때 까지 살았는데 운좋게도 우리가족은 신내동 새로 지은 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이사를 가게됐다. 난생 처음 엘리베이터라는 것도 타보고 침대도 처음 누워보고 나와 언니에게는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그 곳에서 초등학생이 됐고 입학식 땐 숙모가 왔었다. 엄마는 가게를 옮겨 이 동네에서 미용실을 하고 있었고
아빠는 일하러 갔기 때문에 올 사람이 없었다. 뭣도 몰랐을 나이라곤 하지만 그 날의 쓸쓸함은 잊을 수 없다.
그때의 내 사진을 찾아보면 나만 아는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마 그때부터 시작이였던거 같다.
맞벌이 부부 밑에서 자란 우리 자매의 이야기. 우리는 일찍이 철이 들어 버렸다.
학교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 당연하게 부모님은 오시지 않는거였고 내가 딱해보였는지 친구들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곤 했다. 나는 늘 마음 한켠이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로 결핍되어 있는 느낌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성격을 가진 환경적 요인이지 않을까 한다.
부모님과 외식을 할때면 우리 자매는 결정장애였다.
분명 먹고싶은 것은 탕수육인데 절대 말하지 않았다. 끝까지 짜장면을 먹겠다고 말했다.
이건 여담인데 아빠는 우리가 짜장면만 좋아하는 줄 알았단다. 어렸을 적부터 뭘 사달라고 한다던지 뭘 원한다던지 해달라는 말해본 적이 거의 없다. 눈치껏 아빠가 미리 사주던가 굳이 물어보던가해서 얻어낸 것 들이지 떼를 쓰거나 표현해본 적이 없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소통의 부재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의 말썽은 시작됐다.
학교에 등교하던 길에 갑자기 가고싶지 않아져서 혼자 집으로 돌아와 화장실에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왜 태어났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 이유를 계속 묻고 있었다. 정답은 찾지 못했다.
"엄마 다녀왔습니다."
어릴 때 집에 와서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이다.
맞벌이 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언니와 나는 당연하게 알아서 밥을 차려먹고, 스스로 노는 법을 터득 했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녹색어머니 신청을 받던 때 였는다.
우리 엄마는 동네에서 뿐만 아니라 미용 일을 17살부터 시작해서 내가 26살 때 가게를 처분하셨다.
당연히 녹색어머니를 할 수 없는 상황 이였는데 초등학교 4학년 이던 나는 집에서 걸어서 학교까지 가는 길목 횡단보도에 많은 녹색어머니들과 인사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괜히 부러웠나보다.
손을 번쩍 들었다. 엄마의 의사는 묻지 않고. 그렇게 곧장 집으로 가서 엄마한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엄마는 너무 황당해하시며 나에게 왜 그랬냐는 짜증섞인 말투로 뭐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왜 내가 손을 들었는지 왜 묻지 않을까하는 서운한 마음이 제일 컸었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이 신청이 된 상황이라 엄마는 출근 하실 때 보다 더 일찍 일어나셔서 나갈 채비를 하셨다.
녹색어머니를 할 때는 나보다 항상 먼저 나가셨다.
그리고 학교 가는 길목 제일 큰 횡단보도에 서 있는 엄마를 보면서, 매일을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횡단보도까지 뛰어 갔던 기억이 있다. 거기 서있던 엄마는 싱긋 웃으며 집에서 볼 수 없던 다정한 말투로 나에게 "학교 잘 다녀와~" 라고 말해주시곤 했다. 그리고 가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실 때에는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딱 그 횡단보도 위에서만 나에게 지어주는 표정이었다.
이 일을 엄마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너무 황당해서, 또 너무 미안해서.
30살이 된 나는 이제야 엄마의 텁텁한 삶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왜 나에게 짜증을 내었는지, 집에 돌아와서는 왜 웃을 수 없었는지.
지금도 나는 살갑지 않다. 아니, 우리가족은 살갑지 못하다. 표현 하나 따뜻하게 할 줄 모른다.
언니는 결혼하고 나서, 나는 30대가 되고 나서야 왜 우리 가족은 따뜻하지 못했을까에 대해서 답을 알 것 같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친구들을 보면 느껴지는게 있다. 나의 표현은 서투르고 따뜻한 말보다는 현실적인 조언,
옆에 있어주는 것. 이런식의 표현방식 이지만 그들은 말 한마디라도 따뜻한 말을 할 줄 아는 친구들이다.
그냥 내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로 내뱉을 수 있는 사람들. 가끔 이 친구들과 가족들이 너무 부러울 때도 많았다. 왜 우리 가족은 따뜻하지 못할까 왜 이런식의 위로는 못해줄까 라는 비교도 많이 했다.
우리가족은, 또 나는 많이 힘들었지, 라는 말보다 누구나 다 겪는 거야. 라고 말해 놓고 뒤에서는 그 누구보다 내 일 보다 더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방법을 찾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려 노력한다.
이제는 더 이상 비교하거나 원망 하지는 않기로 했다. 우리가족의 표현방식과 그들은 조금 다른 것 뿐이라고.
그렇게 비교 했던 모습 조차도 지금의 나 이니까. 그리고 이제는 아니까. 부모님이 그렇게 각박하게 표현하지 못하며 살아왔던 이유가 우리 때문 이였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서.
부모님의 모습도, 나의 모습도 이제는 이해 할 수 있다.
가게일 하면서 엄마는 음악 한번 듣지 않으셨다. 근데 요새는 방에 있다보면 밖에서 음악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빨래를 널 때, 청소를 할 때 내 방에도 다 들릴 정도로 볼륨을 크게 틀어 놓고 듣는 엄마의 선곡은 ' 분홍 립스틱 - 강애리자(작은별) ' (사실 나는 광복절 특사에서 송윤아가 불러서 알게 된 곡인데, 원곡자는 따로 있었다.)
저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는 엄마가 나는 좋다. 고개를 까딱거리고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 좋다. 내가 말을 시키면 피곤한 얼굴로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엄마의 모습 말고, 지금의 엄마가 좋다.
그리고 나에게 먼저 말 시켜주는 엄마가 좋다.
30대가 된 지금의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말이 많아진 지금의 엄마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