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제3정신학파로 불리는 로고테라피의 장시자입니다
그가 쓴 자서전(빅터 프랭클, 2021, 박상미 역, 특별한 서재)을 보면, 초등학교 5년 무렵에 무한광대한 우주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싸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며 옛날 신화를 생각하던 나의 초등학교 5학년 시절,
까만 밤하늘에는 별들만이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큰 곰 자리, 작은 곰자리가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마주하고 있고, 카시오페아 성좌가 크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별자리 신화들에 빠져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중, 갑자기 내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우주의 끝은 어디인가.......
나는 밤하늘을 보다가 안방으로 뛰어들어오면서
"엄마, 우주의 끝이 어디예요?" 하고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성진이는 철학자가 되었구나" 하고 웃으시면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철학자가 되어가다
이 두려움은 내가 나이가 상당히 들었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나를 기억하지 못할 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늘 가득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이 커지는 만큼, 이 세상의 끝에 대한 생각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그런 생각을 나만 하는 생각인 줄 알았습니다.
나이가 한참 든후, 프랭클의 자서전에서 고백하고 있는 그의 글을 읽으며,
빅터 프랭클도 나와 같은 나이에 똑같은 두려움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두려움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했습니다.
현대 사회는 미래를 생각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데, 미래까지 생각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불안감은 더욱더 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하다-
누구든지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행복을 쫓아갑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를 내 삶에 적용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어떠한 것이 아니다. 행복은 어떠한 것을 행한 결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 의미는 행복이라는 것을 쫓아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주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도전해 나가는 것으로서, 그 결과로써 얻어지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입니다.
행복은 삶의 의미를 생각해 나갈 때 찾아오는 것
그래서 프랭클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지 말라. 오히려 삶이 나에게 묻고 있는 의미를 채우기 위해서 주도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채우도록 하라"
각자의 삶의 주인은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해야만 의미가 생깁니다. 의미가 얻어집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만 가능합니다.
한 때 금수저 흑수저 이야기가 회자되었습니다만,
자신의 노력이 아닌 것은 오히려 자신을 얽어매는 굴레가 될 뿐입니다.
생각해 보시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박사학위를 돈으로 사면 박사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늘 위축된 마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세울 만한 연구실적이 없는데 어떻게 학술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엄청난 재산을, 관리할 수 없는 나이에 받았다면,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 능력이 갖추어질 때까지의 고통이 가벼울 것 같지 않습니다.
또는 능력 갖추기보다는 누리는 것을 택하면 관리할 수 없는 능력 때문에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금수저가 부러운 것은,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불공평에 대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은 그의 복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그가 앞으로 어떻게 가꾸어가는가에 따라 복이 유지될 수도 있고 사그라들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흑수저도 부러울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가 자신의 상황에 도전해 가면서 쌓아 올릴 것들은 미래에 자신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수저가 자랑할 수 있는 것보다도 의미 있는 자산을 쌓아 올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글쓰기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을 가다듬는데 큰 힘이 됩니다.
모든 마음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은데,
머릿속에 갖은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에 쉽게 잠에 빠지기 어렵습니다.
삶에 대한 의미를 깨달을수록 불면증에 빠질 위험은 줄어듭니다.
마음속의 공허함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죠.
어린 시절에 밖에서 놀다 들어와서는 정신없이 잠에 빠졌던 기억을 해 보시면,
그 시절에는 늘 즐거움만이 가득했었다는 것이 기억나실 겁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로 마음은 늘 즐거웠을 것입니다.
글을 쓰는 방법에 따라서는 오히려 번민이 더 늘어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확인하는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은 갈수록 넉넉해집니다.
얼마 전에 나의 일기 쓰기에 관한 글을 올렸습니다만,
나는 지나간 일에 대한 추억은 일기에 쓰지 않습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쓰지 않습니다.
오로지 어제 보다 나아진 나의 모습(생각과 자세)에 관한 이야기만을 씁니다.
어제와 큰 차이가 없는, 오히려 같은 모습의 삶을 살고 있지만,
나에게 주어진 재능을 열심히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인하면서
어제보다는 더 맑아지고 의욕이 커져 있고, 희망이 늘어 난 자신을 확인합니다.
너무도 작아서 현미경으로 봐야 할 정도의 변화라도, 나의 변화로 인정을 하면서 발전된 모습에 기쁨을 가집니다.
잡념을 가질 틈이 없는 매일
그래서 글 쓰는 시간 동안에는 모든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 됩니다.
'왜"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별로 없었는데, 어느 날 '어떻게'라는 형식이 바뀐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시절, 유스호스텔에 기숙하면서 외국 유학생들과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기숙사에는 그리스 학생과 이집트 유학생이 있었습었다.
지금도 그들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리스 하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 떠오릅니까?
신전 건물, 철학자들이 몸에 긴 천을 두르고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모습. 그 정도가 아닐까요?
그리스 학생 조지(Gregory)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알렉산더와 필립 중 누가 더 위대합니까?"
나는 알렉산더는 아는 데 필립이 누구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필립이 누구죠?"
그는, "알렉산더의 아버지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필립대왕,
그리고, 알렉산더는 그의 아들이었던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어도 그리스 신화와 전쟁에 관한 책들을 읽은 덕분이었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필립대왕은 마케도니아라는 작은 나라의 왕이었지만,
알렉산더는 세계를 지배했던 위대한 왕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알렉산더가 위대하죠"라고 단호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지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을 해 주었습니다.
"아니요, 필립이 위대합니다. 그것이 그리스 사람들의 정신입니다."
그리스인의 정신
"필립은 알렉산더라는 위대한 왕을 만들었지만, 알렉산더는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한 "그리스 인의 정신"
그 말이 내 가슴에 꽉 하고 새겨졌습니다.
내가 생각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생각.
내가 어떤 일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아무리 성공을 하더라도, 후계자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인만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왕은 다윗(David)입니다.
그의 아들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참으로 지혜로웠고, 세상에서 그만큼 영화를 누린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솔로몬은 전혀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후계를 키우지 못했고, 그 아들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었으며,
결국은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찬란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어가려면…...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의 저출산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우리가 지금은 세계 10대의 국가에 들어와 있지만, 인구가 점점 줄어들어서 결국 소멸하게 된다면 지금의 풍성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다음은......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초등학교 시절의 그 두려운 마음이 떠오릅니다.
풍요로움이 민족의 영속성을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나라들이 빈곤해서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거대한 제국들도 풍요의 극치에서 서서히 소멸되어 가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 시절의 유적만이 그 자취를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