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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 May 14. 2024

[독후감] 프로메테우스의 불

책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강국진>을 읽고.


1. 프로메태우스의 불


 지금까지 인류가 이렇게까지 괄목할 문명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근원적인 존재는 다름 아닌 ‘불’이다. 그리고 가끔 불은 그 빛이 너무도 강렬하여 ‘불멍을 때릴’만큼 신비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불은 도대체 어디서 와서 이렇게 아름다울까. 마치 하늘에 빛나는 별 같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불은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이, 신으로부터 훔쳐 인간에게 나눠준 선물이다. 그리고 이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지금까지도 전승되어 다양한 곳에서 ‘계몽’ 혹은 ‘패러다임(paradigm)’에 비유되곤 한다. 패러다임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거대한 시대정신을 뜻한다. 인간의 무의식까지 지배하는 사고와 관념. 이것이 패러다임의 역할이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의 저자 강국진은 패러다임의 예로, 문자 지식 지능 패러다임을 먼저 이야기한다.


인류는 문자 발명 이후로 단편적인 정보를 수정, 조합 그리고 확장해 보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인간의 지성은 시공간을 초월해 지식을 축적할 수 있게 되어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 왔다. 축적한 방대한 데이터를 보다 효율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해 인간은 수많은 방법론을 만들어왔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분류와 비교다. 이는 모두 ‘인간 사고에 경계를 만드는 행위’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저자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불모지를 인간 지식 지능 패러다임이라는 범주에 분류하여 먼저 문자지능 패러다임과 비교하고 있다. 


문자가 가져온 지식 지능 패러다임은 인공지능의 기호주의적 측면과 닮아 있다.

문자로 기록된 지식의 원천으로 쉽게 ‘사전’을 떠올릴 수 있다. 사전은 초성과 같은 기호를 따라 책을 뒤적이면 원하는 정보를 얻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인터넷 검색으로 단어(기호)를 검색하여 원하는 정보를 찾는다.

아직 우리는 검색창에 ‘오늘 내 기분에 어울리는 옷 색깔은 뭐야?’라고 검색하지 않는다.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려면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규칙을 스스로 찾아내는 ‘기계학습 인공지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최근 들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도 바로 이 ‘기계학습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이다.

2. 두려움을 넘어


대화형 기계학습 인공지능 Chat GPT의 등장이 과히 파격적이다. Chat GPT는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ML)과 대형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MM)에 기반해 사용자와 말을 주고받으면서 맥락을 이해하고 학습해 원하는 답을 얻는 데 도움을 주는 AI다. 이에 대한 정확도와 해석은 또 다른 검증 절차가 필요하지만,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면 보다 복잡한 실생활 문제를 해결하기에 용이하다. 또한 문제해결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가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제3자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인간의 또 다른 지능 영역인 ‘직관’과 비슷하다. 저자는 이를 ‘실증은 없으나 감이 좋은 형사’에 비유한다.

사실 이러한 기계학습 인공지능은 바로 우리 옆에 와있다. 좋아하는 이미지에 체크하면 인공지능 서비스가 기계학습을 통해 사용자가 좋아할 법한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핀터레스트, 같은 원리를 음악에 활용한 유튜브 뮤직도 그 예시다.


그런데 정말 인공지능이 우리를 모두 예측하기를 바라고 있는가? 압도적인 지능이 등장해 우리를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과 두려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우리에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3. 문자에서 과학으로, 그리고 더 복잡한 세상으로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두려움이 많은 존재다. 이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신앙을 섬기던 종교의 시대를 지나, 여전히 불안한 우리의 삶을 예측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또 다른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저자는 이를 ‘과학 지능 패러다임’이라 명명한다.

과학 패러다임으로 우리는 현상에 대해 정확한 데이터 측정과 검증을 통해 법칙을 발견하고 정확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과학 패러다임에서 진리 추구는 기본적으로 고립된 시스템, 즉 고립계를 지향한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간결한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대한 변수를 제거하고 통제한 실험을 통해 얻은 ‘유의미한 데이터’를 통해서 세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이제 정확하게 측정한 데이터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문제 해결을 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측 불가능한 세상을 통제하려는 노력 그리고 데이터로 검증된 예측 결과가 틀리지 않았을 거라 믿는 풍조는 사실 우리를 어떤 ‘만능주의’에 빠지게 하기 십상이다. 우리가 실제 사는 세계는 변수가 차고 넘친다. 대표적으로 경제와 사회 영역이 그렇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과학적 방법론으로 경제를 예측하려 했으나 1929년 미국의 경제 대공황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으며, 2022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발발도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그 예측을 실패했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수많은 기술 발전으로 편리해진 주변 환경 탓에 모든 게 ‘예측 가능하다’고 착각해 온 탓이다. 원래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고립계가 아닌 변수를 통제하기 어려운 복잡계였다. 인간이 과학이란 도구를 쓴 순간, 과학도 우리를 쓰고 있던 것이다.


3. 과도기

 그동안 과학 패러다임에서는 모든 현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뚜렷하고, 변하지 않는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법칙을 찾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기계학습 인공지능의 대두와 격렬한 사회 변동으로 그것이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저자는 한 일화를 꺼낸다. 

‘사람이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라는 말로 양자역학자 하이젠베르크를 놀라게 한 아인슈타인. 이 일화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을 떠올리게 한다. 가려진 상자에 고양이를 넣고, 50% 확률로 고양이가 죽을 수도 있는 양의 청산과리를 투과하면 이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즉 고양이는 상자를 열기 전까진 살아있고 죽은, 그러니까 중첩된 상태라는 것이다. 이 사고실험과 아인슈타인이 말하고자 한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바로 관찰자가 결정하기에 달렸다는 확률적 태도다.

이 일화처럼, 우리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여겨온 것들도 결국 큰 확률에 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앞서 말한 AI가 답을 내놓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렇게 우리는 기존의 문자 지식, 과학적 법칙과 논리적 사고, 나아가 지식 생산자의 직관과 인공지능의 확률적 태도가 중첩된 제3의 지식을 얻을 도구를 모두 얻은 셈이다.


현재 우리는 과학 패러다임과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과도기에 살고 있다. 과도기는 요즘 같은 환절기처럼 자칫하다간 고뿔에 걸리기 십상이다. 우리는 그토록 맹신했던 과학이 예측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과, 인공지능에게 느끼는 불안을 동시에 몸살감기처럼 겪고 있다. 그러나 고뿔에 걸리고 나면 느끼는 게 있다. 건강했던 내 몸에 대한 성찰과, 반성과 희망 같은. 마찬가지로 이 고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거시적 차원에서 우리 스스로를 살펴봐야 한다.


4. 디지털 낭만주의


 17,18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혁명 이후에 등장한 낭만주의를 대표적인 예로 들어,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 직후, ‘인간이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묻는 시기를 겪어왔다는 통찰이 인상 깊다. 


시대는 크게 변하고 있다. 인공지능 대중화뿐 아니라 전에 없던 국제 정세와 세계 경제, 그리고 기후 위기가 모두의 뜨거운 관심사이자 두려움이다. 이제는 정말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 필요한 거 같다.


 인간만이 사고의 경계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경계가 생겨나고, 희미해지는 과도기 시점에서 새로운 발상과 가능성은 태어나는 법이다. 실제 세상은 환경 변수가 다양하고, 정확한 예측불가능 하며 복잡하다. 기존 과학 패러다임으로, 자신의 전문영역에 고립되어 세상을 바라보기엔 불안한 시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세상에 묻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되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답은 이러하다. 바로 상상이다. 

인간은 상상하는 존재다. 객관적 사실과 주관, 그리고 직관을 모조리 활용하여 이야기를 상상하고 향유하고 믿고 싶어 하는 존재다. 인간이 종교의 신을 믿고 싶어 하고, 과학의 합리성을 믿고 싶어 했듯이 말이다.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고증에 대한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퓨전 사극이 여전히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 최근 오컬트를 소재로 한국의 뼈아픈 근대사를 세련되게 재해석한 영화 <파묘>에 대한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과 믿음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합리적 검증과 과학적 사고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재미와 신선함을 원한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이 복잡한 세상에서 다양한 영역을 횡단하는 시간과 비용을 더욱 단축시켜 가고 있다. 그래서 보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자는 것도 당연한 욕구다. 이 욕구가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이러한 모습에서 디지털 낭만주의의 시작을 떠올린다.

내 디지털 큐레이션 <Blue poison>

앞서 말했던 예로 다시 생각해 보자. 유튜브 뮤직이 내 취향을 맞추든 맞추지 못하든 우리에게 음악은 여전히 좋은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러한 인공지능을 활용한 사용자 맞춤형 서비스의 발달로 몇몇 사람들은 보다 공감각적이고 스토리 연상이 가능하게끔 하는 재미있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소피가 모닥불 앞에 앉아 듣는 음악’, ‘패션쇼에서 파이널 런웨이 할 것 같은 음악’ 같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콘셉트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플레이리스트에 달린 댓글을 보면 다들 작가가 되어 선정된 음악들과 어울리는 몰입도 높은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는 ‘놀이’ 현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엄연히 자기표현과 창작 활동이다. 그리고 연결을 통해 만드는 집단 지능이다. 


5. 새로운 인간

https://www.gycitizen.com/news/articleView.html?idxno=22512

우리는 인공지능과 발달한 미디어를 통해 보다 쉽고 넓게 우리가 만든 경계를 횡단하며 다양한 세계와 열린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우연히 누군가 저 하늘에 떠 있는 별과 별을 이어 이름을 붙였을 때 비로소 별자리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이 별자리를 만든 ‘누군가’가 바로 인간이다. 세계에 놓인 별과 같은 개체들을 이어 설계하고 이야기를 짓는 과정을 우리는 큐레이션이라 부르며, 디지털 기술을 사용할 경우 ‘디지털 큐레이션’이라 하는데, 디지털 낭만주의는 바로 이곳에서 발현할 것이다. 이야기는 결국 인간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빚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문 정신이다.


현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Deleuze, 1925~1995) 말에 따르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는 주름으로 이뤄진 다중체(multiplicity)이며, 이 주름은 하나같이 모양이 다르고 배치가 다른 상태, 즉 아장스망(agencement)이라 정의한다. 들뢰즈는 이 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창조와 생성을 이 주름의 작용이라 말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인공지능은 제3의 지식을 창조하고 생성하는 새로운 지능 패러다임라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단순 최첨단 기술로 써가 아닌 보다 열린 관점에서 이 현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핵심은 ‘연결’과 ‘관계’에 있다. 


자,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손에 쥐었다. 두려움이야 어떻든 불빛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던 또 다른 세계에 접속하게 될 것이며,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토록 변하는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그 답으로 저자는 기술 자체보다는 기술을 허용하는 사회 환경 설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불을 쥐고 살아남으려면 뜨겁거나 타지 않게 보관해야 하며, 그 빛을 가지고 올바른 길을 비추어 나아가야 하니까. 그리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함께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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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미안뉴스 인문 칼럼니스트

브런치 작가

bkksg.com

bkksg.studi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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