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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 Aug 30. 2024

[숨은영화찾기] 천문: 하늘에 묻다

칼럼 또는 에세이 #20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있다. 내 마음의 소리를 알아주는 친구.

걸출한 거문고 명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소리를 잘 알아주는 벗 종자기(鍾子期)를 하늘로 보내고 자기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이야기(伯牙絕絃)에서 유래한 단어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다>는 신분을 초월한 ‘지음’으로서, 조선을 대표하는 성인군자 세종과 그의 신하였던 한국의 다빈치 장영실의 주종관계를 떠난 절묘한 우정을 다룬 영화다.

이 두 인물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한반도 미래에 희망이란 큰 별을 새긴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종은 두말할 것 없이 태평성대를 이룬 조선의 성군이었고, 장영실은 그런 세종을 도와 조선 과학 패러다임을 바꾼 천재였다.


 영화에서 몇 번이고 강조되는 ‘내(세종)가 별이라면, 영실이 너는 그 옆에 있는 별이다.’라며 세종과 장영실이 우정을 나누는 장면은, 모두가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밤하늘에서 모두 함께 한마음으로 반짝이는 별처럼 우리에게 뜨거운 뭉클함을 선사한다.


별은 각종 예술 작품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을 가리켜 주로 사용하는 소재다.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 우리는 쉽게는 쉽게 지존(支存)이신 ‘왕’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수 있다. 과거 왕정 시대에서는 왕이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권위와 역사 그 자체였고, 모두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별과 같은 그대’가 이런 왕과 같은 신분만을 뜻하진 않는다. 세종이 원했던 것처럼 모두가 읽고 쓰는 세상, 문자와 해석 권력을 모두가 가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수많은 개혁과 혁명 끝에 인류 역사에서 왕과 같은 권력자는 오히려 감시해야 할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천지개벽한 세상이다.


영화 <천문>은 오늘날 같은 세상을 일찍이 꿈꾼 두 천재의 우정 이야기이자, 사실은 관노 출신이었던 장영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성군 세종 눈에 띄어 출세했지만, 출신과 신분의 벽 때문에 주변 질투와 시기를 숨 쉬듯 겪어야 했던 인물 장영실. 나는 그의 삶에서 오늘날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읽는다. 영화에서 세종과 장영실의 바람대로 모두가 읽고 쓸 수 있는 세상이 된 지 오래지만, 치열한 경쟁과 날이 갈수록 벌어지는 사회적 격차 속 우리는 또 다른 별을 마음에 품어야 하기 때문일지도.


이럴 때일수록 내 마음 알아주는 친구 하나 가지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누군가의 작은 행운이 시대와 맞물려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내기도 하니까. 세종과 장영실처럼.


백아는 친구가 죽어 절현(絕絃)했지만, 영화에서 세종은, 안여 사고(1442)로 누명을 쓴 장영실의 마지막 결단을 위해서라도 한글창제와 같은 대업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둘이 꿈꾸었던 미래를 위한 결정한 위대한 업적이고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영원한 둘만의 추억이리라.



영화 후반부쯤, 영실은 세종에게 묻는다. ‘왜 이런 외로운 길을 가려하시냐’고.

저 밤하늘에 있는 별은 스스로 빛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실상 별은, 너무나 가까이 가면 타버리고, 너무나 멀어지면 얼어붙어버리는 외로운 존재다. 장영실은 그것을 세종에게 묻는 것이다. 세종은 답한다. ‘자네 같은 벗이 있지 않나’라고.


나는 영실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우리와 가장 가깝게 빛나는 별인 태양 덕분에, 너도나도 이렇게 한 번은 살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별천지 같은 희망을 품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별을 닮은 동지와 함께 별보다 더 빛나는 미래를 향한 실천. 그것이 영원(永遠)이고 천문(天文)이니까.


하늘에 물었다. 하늘이 답했다.

우리는 모두 별이다.


_이로 글


움직이는 화랑 <비껴서기> 운영 |

코스미안뉴스 인문 칼럼니스트

브런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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