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제 May 30. 2023

터무니없이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기꺼이 불행하고 대책없이 사랑하는 <구의 증명> - 소설과 연극을 보고

1. 글과 음악과 생각:

머리 쓰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사랑하고 싶다. 김사월의 <너무 많은 연애>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김사과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상이 '구'와 '담'과 겹쳐 보였다. '구'는 최소한 둘의 관계를 끝내려는 시도를 해 보았다는 면에서, '담'이 좀 더 닮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풀이 눕는다>.

릿터 최신호에서(인줄 알았는데 인스타 다시 찾아보니 아닌 듯도 하다... 어디서 본 걸까 아무튼 최신 문예지의 일부였던 듯하다) <구의 증명>의 주인공들이 대책없는 불행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원인으로,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고 돌봐주는 시스템의 부재를 지목하는 대목을 보았다. 한 문학 평론가의 글이었던 것 같은데, 매우 공감이 가고 이 작품을 여러 시선에서 읽음으로써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소설은 그저 '구'와 '담'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책없이 불행하지만 대책없이 사랑하는 관계를 그린 부분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작가의 말에서 언급되기도 하고, 연극에서 커튼콜 이후 관객 퇴장 시간에 재생된 음악은 '9와 숫자들'의 <창세기>였다. 아는 밴드의 모르는 노래였어서, 극장에서 노래가 울려 퍼질 때 순간 검정치마인가? 싶기도 했다. 연극 끝나고 집 가는 길에 가사를 보니 구와 담의 관계에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독자 입장에서는 담이 구에게 불러주면 좋을 것 같은 노래였다.

이 글의 제목을 고민하다가 문득 최은영 소설 <애쓰지 않아도>의 서문이 생각났다. 죽은 구의 몸을 뜯어먹으며 담은 구에게 왜 이토록 자신을 괴롭게 하냐고,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냐고 울부짖었다. 구가 살아있을 때에는 하지 않은 말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해야 하는 까닭을 찾고 싶은 욕망이나,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찾고 싶은 욕망에서 이들은 자유롭다. 그들의 불행은 오직 외부의 환경에서 비롯된다. 적어도 구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그랬다. 살아있는 동안 구는 빚을 갚기 위해 온갖 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담과의 관계에서는 노동의 성격을 띠는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담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 최은영, <애쓰지 않아도>



2. 책 읽으며 궁금했던 점:

장마다 있는 ○, ● 표시는 작가가 집필할 때부터 의도한 구성일까? 아니면 편집자에 의한 것이었을까?

제목이 왜 '구'의 증명일까. 이 소설은 '구'와 '담'의 이야기이지만, 주인공을 하나로 좁혀야 한다면, 무의식 중에 죽지 않고 현실에 남아 있는 쪽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담이 아니라 구였던 걸까? 구가 죽었음에도 그의 영혼이 살아서 죽은 자신의 육체를 먹는 담을 관찰하고, 이야기하는 것에 미루어 보았을 때,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등장인물이 사망 이후 더 이상 자신의 시선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인물이 소설 내에서 계속해서 자릿값을 차지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담의 시점은 빈 원(○)으로, 구의 시점은 꽉 찬 원(●)으로 구분한다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 소설은 사실 구의 시점에서만 쓰인 것이 아닐지? 



3. 밀리의서재 하이라이트와 메모 겸 일기: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일기 다수 포함)


(1)

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 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으라. 그러면 말이 된다.

때로는 무언가에 대해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일과 정서적으로 수용하는 일의 순서가 뒤바뀌거나, 그래야만 할 때가 있기도 하다.

나의 경우에는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성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자면 살지 않아야 할 이유만 눈에 들어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받아들이자. 그러면 일단은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때가 여럿 있었다.


(2)

살아 있을 때도 원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해...(중략)...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나는 내 마음을 읽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죽는 모습을 너에게 보이기 미안했다. 죄스러웠다. 너에게 그런 짐을 떠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 부재만큼이나 네 남은 생에 지우기 힘든 얼룩과 상처를 남길 테니까. 죽기 전에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은 없었다.
그런 것은 말이 되어 나와버리는 순간 본질에서 멀어진다고, 말이 진심에서 가장 먼 것이라고, 너는 나의 그런 마음까지 알고 있으리라 믿었는데......
근데 그런 걸 지나간다고 말할 수 있나, 이모. 지나가지 못하고 고이는데. 고유하게 거기 고여 있는데

작년 늦봄부터 내 마음이 매여 있는 어떤 장소가 떠오르는 구절이었다. 많은 일들이 끊임없이 쌓이고 흘러가도 나의 생각과 감정이 결국에는 향하고 마는 곳. 나의 우울의 근원이 깊숙이 묻혀 있는 곳.


(3)

구 대신 들어온 다른 것들이 터무니없이 옅고 가벼워서 구의 밀도를 대신하지 못했다. 구 에 비하자면 친구나 공부나 학교 따위 너무도 시시했던 것이다.

이건 열아홉 살을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고.

생각해 보면 10대 때는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4)

흰밥 한 숟갈을 퍼먹고 열무김치를 우적우적 씹을 때도 담이 생각이 났다.
괴롭다는 것은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

첫 번째 인용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의 내가 떠올랐다. 중요한 전제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때.

두 번째 인용은 내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5)

매일 밤 일기를 쓰듯 담이 집으로 갔다.
몸은 고되고 앞날은 곤죽 같아도, 마음 한구석에 영영 변질되지 않을 따뜻한 밥 한 덩이를 품은 느낌이었다.
미래에 대한 내 근육은 한없이 느슨하고 무기력했다.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세상이 보온밥솥에 담긴 밥 한 그릇 같던 날씨. 사람들은 찐득하게 엉긴 밥알처럼 서로를 못 견뎌했다.
쓰레기로 제 속을 탱탱하게 채운 비닐봉지

맘에 드는 비유여서 밑줄 친 부분들. 모아두고 보니 밥을 보조관념으로 쓴 표현이 많은 것 같다.


밀리의서재 구독은 해왔지만 전자책으로 한 권을 완독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인적으로 전자책을 실제 도서의 페이지와 비교하며 읽을 수 있으면 더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

뭐랄까, 좁아졌다. 몸만 크고 내면은 짜부라진 것 같았다. 넓고 큰 도화지를 두 손으로 구깃구깃 구겨 아주 작은 공처럼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나는 매일 비슷한 말만 했다. 어서 오세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이 정도면 될까요.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것 말고 달리 할 말은 없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의 외연이 급격한 속도로 좁아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색하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성찰의 빈도와 깊이도 줄어들고, 타인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나 호의 또한 말라 없어지다시피 하고 있는 것 같다. 환경의 탓인지 나이의 탓인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변화는 결코 반갑지 않은 변화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책임이라는 것이 좁고 깊은 영역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가는 일이겠지만, 점점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7)

느긋하게 섹스해도 될 만큼 넉넉한 시공간 속에서도, 우린 자주 조급해했다.
우리가 함께한 그 많은 밤도, 온 우주를 통틀어 우리만 알던 비밀. 그리고 이제는, 나만 아는 비밀.

사실 나는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는 관계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지가 궁금하다.

두 번째 문단에 대해서는 시인 이상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이 /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소설 <실화> 첫 문장)

나이가 들면서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남과 공유할 수 없는, 이제는 나만 아는 비밀들이 나를 두텁게 둘러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8)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이유가 필요했는데,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게 과연 사랑일까."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첫 번째 인용은 누나와의 관계에 대해 '구'가 생각한 것이고, 두 번째 인용은 헤어지자는 '구'의 말에 '담'이 한 말이다.

담의 말은 꿈에 도전할지 말지 결정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되묻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네가 겪어야 할 수많은 시행착오와 번거로움과 자존감이 깎아먹힐 일들과 자질구레한 찌꺼기같은 일들을 감수할 수 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보면 꿈이라는 것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미래의,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실제로 존재하게 될지 아닐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강렬하게 사랑해야만 품을 수 있는 무언가라는 생각도 든다.


(9)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 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부쳐지지 않는 편지를 마침내 전하게 되거나, 먼저 돌아오는 답장을 받기 전까지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 나의 스물 세 살과 스물 네 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한 것 같다.


(10)

운전을 하게 된다면 옆에 담을 태우고 꼭 바다에 한번 가보리라고 어릴 때부터 생각했었는데.
우리의 행복. 행복이기에 불행.

첫 번째 문장은 중1때 영화 <브레이킹 던 pt.2>가 개봉했을 때가 떠올랐고,

두 번째 문장은 얼마 전에 새로 나온 오은 시인의 <없음의 대명사>가 떠올랐다.


(11)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미 진 것 같았다.
할아버지도 이모도 죽고 이제 구마저 없고, 나만 살아 있다.
나는 이 문장의 의미에 대해 매일 생각한다.
기이했다.

노마가 죽었는데, 노마의 죽음을 망각하고도 불행해진다는 것이.

구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과 별개로 불행감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가끔 나의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신기할 때가 있다.


신촌에 있는 극장plot. 선 연극예매 후 원작읽기였던 이번 독서였다.


4. 극장PLOT에서 연극을 보고

사실 작품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구'와 '담'의 관계에 '누나'가 개입해 있는 부분이다. 소설에서 구가 처음으로 누나와 섹스한 날을 떠올리는 부분과, 비가 오는 날 퇴근한 구와 누나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담이 "구를 봤다."라고 반복하며 떠올리는 부분. 첫 번째 부분은 연극에서 생략되어 있었고, 두 번째 부분은 극에서도 나타나 있었다.

이모와 누나 역할은 머리를 묶고 품에 따라 구분하여 한 명의 배우가 맡았고, 노아는 인형으로 대체되어 이모 겸 누나 역할의 배우가 목소리를 연기해주었다.

공연 예매창인가에서, 소설의 문체를 그대로 살린 극으로 소개가 되어 있던 것 같은데, 정말로 그랬다! 극의 장면마다 혹은 장면과 장면 사이마다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빔 프로젝터로 띄워주는 것도 그렇거니와, 배우들의 대사 또한 구어체로 변형한 것이 아니라 소설에 쓰인 평서문을 그대로 따다 옮겨져 있었다.

연극 관람일 무렵에 소설을 완독했다보니 원작과 극을 비교하며 관람하기가 쉬웠다. 생략된 부분은 생략되고, 순서가 옮겨지거나 합쳐진 부분도 있었던 것 같은데 기록하는 지금으로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원작에서 뜻밖의 부분이 극의 중간에 발췌되어서 오! 순서 되게 잘 바꿨다고 속으로 감탄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래서 기록을 할 거면 미리 해야한다.

소규모 극장이었고 배우들과 눈맞춤이 가능할 정도로 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가 정말 가까웠다.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던 건 배우들이 삼면의 관객 방향을 바라보며 대사를 하면서도, 절대 관객들과 눈을 맞추지 않는다는 거였다. 먼 허공을 향해 외치듯이, 평서문으로 된 대사를 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연극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홍익문고에 들러 <구의 증명>을 책으로도 샀다. 개정 전 표지가 더 마음에 들어서 선뜻 온라인 주문을 못 하고 있었는데, 마침 내가 찾는 버전이 1층에 전시되어 있었다. 공간으로서의 서점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또 한번 직접 경험한 날이었다.

무대 의상이 인상적이었는데, 배우의 몸짓을 부각하면서도 주인공들의 때묻지 않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흰색 옷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5.

아름다운 글을 무대 위로 옮겨서 구현하는 일은 정말 멋진 일일 것 같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일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작가의 이전글 중개자의 시선으로부터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