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사과 무새'가 되었는가
우리 아이들은 다섯 살 터울임에도 툭하면 싸운다. 키득키득 거리며 붙어서 노는 것도 잠깐 어느샌가 으앙 하는 울음소리(당연히, 대부분 둘째다), 첫째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출동하면 대부분 눈치를 보다가 저마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더 과격하게 다툴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닌텐도를 조금이라도 더 하거나 더 놀기 위해서(저 정도 싸웠으면 그냥 안 놀고 말지, 할 텐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들끼리 '사과'를 선택하기도 하는데 사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서로 꼭 한 번씩 등을 꼭 쓰다듬으며
"미안해, 형아. 내가 잘못했어."
등을 다시 대충이라도 쓸으면서(터치를 가장한 주먹으로 쓸어내릴 때도 있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미안."
몇 초 전까지 혼돈의 도가니 같았던, 아수라장 같은 상황이 쓰다듬는 동작 하나에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운 일을 해낸 아이들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마음'하나 먹으면 되는 건데 …
어느 날, 하루아침에는 아니지만 너무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서 부모님께 사과를 요구한 적이 있다. 친구들도, 신랑도, 대부분 그게 뭐 사과할 일이냐. 그 정도면 행복한 환경에서 널 잘 키워주셨는데라고 했지만, 사과를 꼭 받아야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나의 '사과, 사과, 사과'는 계속 이어졌다.
아니, 어린 시절부터 나한테 딱히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조금이라도 신경이 거슬리거나 싫은 일을 맞닥뜨리면 바로 이야기하거나(하지만 따지는 걸로 보였겠지) 말로도 표현을 못할 것 같은 상황이면 상소문같이 길게 주욱 이어진 편지를 썼다. 사과, 사과, 사과. 사과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거라도 받아내겠다는 오기 같은 거였을까. 다들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정말 사과를 해주기도 하고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선생님들께서는 어떤 돌발 행동이 신경 쓰이셨던 건지 (그런 상소문 몇 장의 편지는 처음 받아보셨을 테니) 내 마음을 풀어주려 하시거나 칭찬할 일이 아닌데도 만들어서 나를 칭찬해주시기도 했다. 중2병 시기, 지독한 사춘기를 앓던 시기이기도 했으니, 스승의 은혜에는 그저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와 크게 다퉜다. 그만 이야기해 달라는 내 말에도 내 기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말이 오갔고 결국 나는 폭발해서 엄마에게 화를 냈다. 아이들과 신랑, 모두 차 안에 있었지만 어떤 감정을 가라앉고 좋게 말하기보다는 '폭발'처럼 터지는 상황에 순식간에 엉엉 울음이 먼저 터졌고 사과를 해달라고 또 끊임없이 요구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하여간 그랬다.
당연히 엄마는 본인 역시 사위와 손주들 앞에서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딸에게 망신을 당했으니 내 태도가 더 어이없고 화가 난다며 절대 사과할 수 없다고, 그냥 어디서든 내리겠다고 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도 칼같이 덧붙였다.
나는 그저, 늘 내가 원한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결국은 다툼과 사과 무새처럼 사과사과사과 얘기뿐인 나 자신이 참 밉고도 싫었다. 하지만 이렇게 안 했으면 뭔가가 또 다른 날 터졌을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엄마는 그렇게 화가 난 상황 속에서 엄마 체면과 상황은 중요하고 내 아이들과 신랑 앞에서 나를 비교하며 깎아내리고 나쁘게 말하는 것은 내 체면은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걸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고 그날은 울음이 멈추지 않아 차 안에서 통곡하듯 울고, 또 울고 뒤에서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가 아주 나빠! 엄마를 울렸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도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도 정신이 차려지지도 않았던 것 같다. 제일 먼저 떠오른 언니한테 전화하고 싶었지만 영국이 머나먼 나라라 와중에 시차가 생각났고(이것도 너무 슬펐다) 두 번째로 떠오른 게 우리 아빠.
>>그래도 와중에 가족들 욕을 누군가에게 하기보단 가장 잘 아는 내 가족들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빠가 생각나서 전화해서 또 한 바탕 엉엉엉 울었다. 다짜고짜 수화기 너머로 내가 울고 있으니 아빠는 진짜 무슨 큰 일이라도 난 줄 알고, 어쩌질 못하고 얼른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를 말하라고 다그쳤다.
겨우 울음을 삼키고 걱정했을 아빠에게
누구 죽은 거 아니야,
그냥 너무 속상하고 울음이 안 멈춰서
언니한테 전화 못해서 아빠한테 이르려고 전화한 거야.
그제야 한숨 돌리고 너털웃음을 짓는 아빠, 수화기 너머에서도 안도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래저래 상황과 답답한 마음을 다 쏟아놓으니 아빠도 엄마에게 자기도 속상하고 서운한 점을 말하더니
야야, 내가 다 미안하다. 내가 다 잘못했다.
너 사과받고 싶었지? 사과, 사과, 사과 내가 오늘 할게.
미안하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다.
세상에, 뜻하지 않았던 사건과 상황에서 울 아버지한테 사과를 받았다. 아빠는 잘못하고 네 말이 다 옳아도 절대 부모는 자식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다며 못 박은 분인데 그런 이야기를 계속하시니 나도 모르게 손으로 아빠의 '미안하다'횟수를 꼽고 있었는데 열 번도 넘게, 내 마음을 달래주고 계셨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 딸도 꼭 이런 나처럼 손가락으로 금자의 사과 횟수를 셌는데...
그러게, 진작 해달라고 할 땐 절대 안 하더니 본인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는, 으아아 앙.
또다시 터져버린 울음.
아빠가 다 울었냐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야야, 이제 내가 사과했으니 그만 울어라.
너무 울지 말고 좀 진정해 봐라.
00아, 이제 네 나이에 엄마 아빠가 다 죽고 세상에 없어도
너는 세상을 살 수 있는 나이다.
이미 독립을 해서 네가 애들 엄마고 네 가정이 있잖냐.
엄마 죽고, 아빠 죽으면 뭐, 뭐 …, 그게 슬프지만 어째, 따라 죽을 거야?
그런 것도 말도 안 되지.
때론 부모 자식이어도 거리가 필요하고
너도 네 생활과 네 삶을 살아라.
그냥, 네 삶을 살면 돼. 그냥.
아...,
마지막엔 울다가 웃음이 터졌는데 아빠의 말이 다, 전부 맞는 말이기에 또 눈물이 터졌다. 우리 아빠가 이런 순간에, 나에게 이렇게 사과도 해주실 수 있는 분이었구나.
내가 가슴이 아프고 울었던 이유는 아직 쓸 용기가 안 난다. 그 역시 그냥 내 안에 쌓인, 내가 마음에 건드려질 때마다 아팠던 부분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빠의 말은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늘 엄마랑 다퉈도 그냥 다시 아무렇지 않게 엄마 옆에 붙어있고 달려가고 그렇게 있으니 어쩌면 나도 화만 내며 사과만 요구하는 '사과 무새(사과만 요구하는 사과 앵무새)'였지, 내 마음을 솔직히 다 털어놓고 진정하고 이야기를 꺼낼 준비가 안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사과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왜 사과를 못해? 나는 정말 잘못하면 우리 애들이라도, 다른 사람 앞에라도 마음 풀어진다면 무릎도 꿇을 수 있어. 고마운 거, 미안한 거 그거 왜 표현을 못해? 못하냐고?
어쩌면 엄마에게 절규하게 했던 내 말에 내 유년의 쌓여있던 서운함과 서러움이 폭발한지도 모르겠다. 아버진 날 이기겠다고 해주셨는데 간간이 전화해서 엄마의 상황을 웃으며 전달하기 바쁘시다. 이제 화는 좀 풀렸니?로 시작하는 아빠의 첫마디에 나도 이젠 대답을 드려야겠다.
**사과 무새란 제목으로 내 이야기로 동화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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