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취미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은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비슷하다. 첫 만남에 남녀 주인공은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계속 마주치면서 엮이고 친해지고 오해가 풀리고 호감을 쌓아가면서 감정을 발전시킨다. 사랑이 싹틀 무렵 방해꾼이 등장하고 주인공은 현실을 직시하지만, 방해꾼은 오히려 그들의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결말은 드라마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러다 서로 질려서 헤어지거나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드디어 하나가 된다. 관계는 사람 사이에만 있는 걸까?
취미의 첫인상은 늘 자극적이었다. 운동도, 춤도, 여행도, 바둑도, 그림도, 마음에 드는 문구도 첫눈에는 근사해 보였다. 어떤 취미는 오랫동안 꿈꾸던 미래를 암시하기도 했고, 남몰래 숨겨둔 나의 결핍을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배워두면 유용할 것 같았고, 그냥 무작정 좋아 보이기도 했다. 내가 거쳤던 취미들은 나의 기대와 환상을 자극했다.
시작은 취미의 주기에서 가장 설레는 단계다. 뭐든 새롭게 배울 때는 그저 좋다. 잘하면 재밌고 못 하면 신선하다. 취미를 갓 배울 때는 시간 단위로 실력이 쭉쭉 느는데, 그 과정이 그저 즐거워서 배우는 내 모습이 멋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취미와 한층 가까워지고 취미가 삶의 활력소가 된다. 이 단계에서는 괜히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다가 미리 지쳐버리지만 않으면 관계에 방해될 게 없다.
취미가 점점 좋아지면서 훅 빠지는 단계가 온다. 일상이 취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돈이나 체력, 시간문제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지만, 오히려 취미를 향한 나의 열정과 의지를 굳건하게 할 뿐이다. 취미생활에 집중하면 현실의 문제들을 잊게 된다. 취미가 너무 좋다. 사랑에 빠진 것 같다. 틈만 나면 하고 싶다.
뜨거운 단계를 거친 후에는 하강기로 접어든다. 여전히 취미를 좋아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한동안 직선으로 쭉쭉 늘던 실력이 정체기를 맞으면서 잘하는 모습보다 잘하지 못하는 모습에 신경이 쓰인다. 마냥 좋았던 취미가 애증의 관계로 바뀐다. 더불어서 취미생활에 방해가 되는 현실적인 문제와 취미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취미생활도 엄연한 관계였다. 이 시기를 고비를 넘기면 취미생활을 이어가고,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취미와 나의 관계는 끝났다. 그렇게 취미와 관계가 끝나면 추억처럼 가끔 생각날 때는 있었지만, 예전처럼 꾸준히 즐기진 않았다.
이 단계에서 그만둔 취미가 많았다. 취미와 가까워지는 데는 열정과 집중이 필요했지만, 취미를 유지하려면 안정적으로 멀어지는 법을 알아야 했다. 중독성에 이끌려 몰입하면 일상생활이 어려웠다. 잘하려고 계속 노력하면 탈이 났다. 욕심이 커질수록 잘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취미가 부담스러워졌다. 애쓰다 제풀에 지쳐서 취미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취미를 유지하는 건 불확실성을 견딜 수 있는 믿음이었다. 화려함은 관계의 시작에, 일관성은 관계의 유지에 필요했다. 큰 욕심 없이 대충 꾸준히 할 때 취미와의 동행이 오래도록 갔다.
새벽부터 창밖에 안개가 자욱하다. 일주일 가까이 맑은 날이 계속되다 오늘은 흐린데, 안개 낀 풍경이 나름 운치 있다. 바다 위로 피어오른 물안개가 자연을 포근하게 품어주는 모습이 참 아늑하다. 날씨가 맑은 날도 흐린 날도 있기 마련인데, 흐린 날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최근 며칠 동안 맑은 날을 충분히 즐겼기 때문일 것이다.
관계도 비슷한 것 같다. 내일 당장 관계의 날씨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지내다 보면 추억은 하나둘 쌓이기 마련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취미와의 관계도 그렇게 여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