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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Mar 16. 2021

배워서 남 주기

성장하는 삶에 대하여

  글쓰기 수업 때 선생님이 ‘배워서 남 주랴’를 각색해서 ‘배워서 남 줘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많이 와 닿았다. 예전에 무작정 혼자 오성급 호텔에서 묵거나, 호텔 레스토랑에 가거나, 멋있는 절경을 감상하면 좋았지만, 혼자 누리는 기쁨에는 한계가 있었다. 같이 나눌 때 즐거움이 배가 되는 건 취미도 마찬가지였다.


  취미생활을 꾸준히 하면 어느 순간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 이른다. 성숙도에 이른 취미 시장은 프로로 가는 과정이 이미 세세하게 단계별로 나뉘어 있지만, 블루오션인 취미일수록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모호하다. 일정 수준의 스펙을 갖추거나 그 바닥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 다양한 기회와 일자리 제안이 들어온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 앞에만 서면 목소리가 떨렸다. 피아노 대회를 나갔을 때, 반장선거를 나갔을 때, 회사에서 발표할 때면 의지와 상관없이 떨렸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상황을 꺼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의 고질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싶었다. 살사 강습의 기회가 왔을 때,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실력이 되는지 걱정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말을 덜 하고 몸으로 가르치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첫 수업을 준비할 때는 이것저것 잔뜩 준비했다. 커리큘럼부터 의상, 음악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신경 썼다. 수업내용을 정한 후에는 실수할까 봐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연습했다. 잘하고 싶었다. 첫 강습을 할 때는 쿵쾅대는 마음과 격앙되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준비한 대로 해내기 바빴다. 수업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다. 수강생들을 살피고 교감할 여유가 없었다. 


  이후 바둑과 운동에서도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 1대 1, 소수 인원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것은 부담이 덜 했다. 편한 마음으로 가르치면서 또 다른 세계가 열렸다.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행위였다. 내가 아무리 많이 준비하더라도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혼자 쏟아내면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 내가 말을 많이 할수록 상대방은 지루해하거나 버거워했다. 많은 내용을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필요한 얘기를 해주면 수업 피드백이 좋았다. 교감이 잘 되는 상황에선 내가 내용을 세련되게 정리해서 전달하지 못해도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했다. 가르친다는 것은 혼자서 잘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배움은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양쪽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작업이었다. 


  가르치는 일을 반복하면서 긴장감은 사라지고 흥미가 생겼다. 모르는 사람과 운동, 춤, 바둑이라는 매개체로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주파수를 맞추고 집중하고, 대화와 반응을 통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좋은 감정과 느낌을 주고받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가르치는 경험이 쌓여갈수록 가르치려는 대상은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가르침의 본질은 교류에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은 나 자신을 단단하게 해 줬다. 


  학생으로 시작해서 선생이 되는 경험은 삶의 방향성을 많이 바꿨다. 나 자신을 위해 배울 때는 그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이기적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것을 염두에 두고 배우면 배움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배울 때무터 다양한 관점과 상황들을 미리 예상하고, 동시에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을 유추하면서 시각이 넓어졌다. 가르치기 위해서 내가 아는 것을 요약하고 정리하면서, 내가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이해의 폭도 커졌다.


  배움에도 순환이 있다. 누군가에게 받았던 배려와 친절, 격려와 수고와 가르침은 생명력이 있다. 꽁꽁 싸매어 혼자 보관하면 빛이 바래어 사라지지만, 공유하거나 베풀면 더 생생해지고, 확장된다. 내가 베푸는 것 같지만, 나 역시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경우가 더 많다.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 가장 효율적인 배움의 방법이다.


  앞으로도 학생이면서 선생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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