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o Apr 10. 2021

<5>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공무상 재해, 공상처리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다.

지인이 유사사례를 소개해주며 필요서류에 대해 알려줬다.


'수년간의 의료보험기록(신경정신과 기록 없는),

각종 동향보고, 병원에서 폭행으로 인한 PTSD 진단받기, 

지속적인 진료기록, 설득력 있는 상병 경위서.'


이렇게 챙겨가면 재해보상팀이 심사를 할 거란다.

공상처리의 문턱이 이렇게 높구나.


신경정신과 진료를 예약했다.

공상처리가 안되면 치료비는 내 부담이긴 한 데

지금 돈이 문제인가.


나는 '곰 같다'는 평을 듣는 평범한 남자였다.

매사에 둔하고 묵묵함을 미덕으로 삼는.

나도 나를 몰랐다.

현장 나가서 주취자에게 폭행을 당하기 전까지는.


폭행당한 이후 나는 상대방의 욕설에 굉장히 예민해졌다.

사건이 일어나던 날, 욕설과 함께 폭행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감정이 완만하게 올라가는 게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더니

흥분은 상황이 종료된 후에도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슬프게도 밤 10시 이후의 출동은 셋 중 하나는

욕설을 동반하는 주취자들의 구급 요청이었다.


길바닥에 누운 채로 토사물이 범벅되었음에도

의식이 또렷한 주취자.


파출소에 체포된 상태로

대한민국 공무원의 업무태도를 지적하는 범죄자.


병원 갈 생각이 없는데

부모가 자신을 신고했다고 난동 부리는 패륜아.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죽으면 책임질 거냐고 시비 거는 일반인까지.


이 사람이 주먹이나 기물을 휘두르면 어떡하지?

어떤 동네에서는 외국인 환자가 칼도 휴대한다던데...

온갖 걱정과 불안이 머릿속을 꽉 채운

내가 현장활동을 제대로 해냈을 리가 없다.


대학병원 신경정신과는 예약이 꽉 차 있었고

한 달을 넘게 기다려서야 비로소 진료가 가능했다.

진료실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앉아 있었다.

나는 브리핑하듯 내 소개를 하고 CCTV 영상을 보여드렸다.

말보다 동영상이 상황을 알리는 데 더욱 효과적일 것 같아서.

의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시청하다가 이내 말을 꺼냈다.


얼마 전 있었던 대학병원 신경정신과 외래에서 일어난

환자가 의사를 살해한 뉴스를 기억하시냐고.

고인께서 자신의 지인이었다며

본인도 그 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한다.

내원하는 사람 중에 공격적 성향을 가진 환자가 많며.

산속에서 벌에게 쏘이는 것과

초대받은 집에서 XX개에게 물리는 것은

정신적 충격이 같을 수가 없다며.

좋은 일 하시는 분께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안타깝단다.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는 취미, 운동을 추천해주었고

주변에 심리적으로 안정을 줄 수 있는 자원이 있냐고 물었다.

가족이 있다고 대답했지만

집에서는 회사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모바일 RPG 게임에 만렙 찍은 캐릭터가 있기는 하다만...

농담을 떠올릴 정도로 진료는 훈훈한 분위기였고

짧고 두툼한 심리검사지를 받았다.


임상심리사와 심리검사를 진행했고

다음 진료 때 의사는 내게 진단을 내렸다.


적응장애.


정신사회적인 스트레스 요인이나 개인적인 재난 같은 스트레스를 겪은 후

일정기간 이내에 발생하는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감정적 내지 행동적 장애.


공황장애나 PTSD 같은 무시무시한 진단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증상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경증이라.


특별사법경찰에게 문의했더니 소송장을 접수했으니

곧 형사재판이 열릴 거라고 알려줬다.

나는 형사재판과 별개로 민사소송을 준비했다.

가해자가 징역을 살던 벌금형을 받던

정작 피해자인 내게는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이고

민사소송을 통해 위자료라도 받을 속셈이었다.


법률구조공단에서 유사한 자료를 내려받아 소송장을 작성하고

자문을 받아 병원 실비를 포함한 위자료도 책정했다.

이제 느긋하게 형사재판 결과를 기다렸다가

'가해자 XX는 해당 사건에 대한 형사재판에서

XXXX의 판결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라는 문구를 소송장에 추가하면 이제 본 게임이 시작된다.

형사재판보다 더 살벌한 민사재판이.

 

'복수는 나의 힘' 이라더니 이제야 기운이 좀 났다.

재판을 기다리는 나의 심정은

타이틀이 걸린 권투시합을 갖는 복서의 마음과 같았다.

급소만 골라 타격할 악의로 똘똘 뭉쳐있는.

나의 잘못이 1도 없기 때문에 승소는 예정돼 있었다.

형량이 관건이다.


유예된 분노의 감정과는 달리 트라우마는 나아지지 않았다.

근무시간 내내 강제로 징집된 군인처럼 복무염증이 도졌다.

직장인으로서 나 자신에 대해 자존감이 떨어졌고

조직과 업무환경에 대한 회의감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업무가 싫다 보니 조직이 싫어졌고

조직이 싫다 보니 제도와 현 상황이 싫어졌다.

부정적인 마음이 쉽게 전염되듯

부정적인 시선 역시 광범위해져 갔다.


왜 이렇게 출동이 많을까.

급하지 않은 사람들이 긴급자동차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내가 아프면 응급인 게 사람의 심리이고

갈 병원 많고 구급차가 공짜인 한국은 구급출동이 적을 수가 없는 곳이다.

다만 119 안전센터에도 구급차가

파출소 순찰차처럼 3대 넘게 배치되면 좋으련만

인구수에 비해 구급차는 턱없이 부족하다.

몇 만 명 기준으로 구급차를 1대밖에 운용하지 않다 보니

긴급한 환자가 발생했을 때 관할 구급차가 부재한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수 km 떨어진 곳에서 출동하느라 골든타임을 놓치는 비극.

이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119 구급차는 법률에 의하면 응급환자를 위한 긴급차량이다.

현재의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은 모두가 갖고 있다.

그렇다면 소방청은 비응급환자를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현행 119 법에는 위급상황을 거짓으로 알린 자는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적용한 사례가 몇 건이나 될까?

2015년의 기사를 찾아보면 한 건도 없다고 나온다.


언젠가 상황실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해준 말이 생각난다.

'휴대폰에서 USIM을 빼고 119에 전화해서 헛소리하고,

술 취해서 집에 데려다 달라는 전화가 엄청나게 온다.

그런데 장난전화로 본부 차원에서 처벌한 건 수는 1건도 없다고.'


원인이 뭘까.


숫자로 표기되는 건수가 성과인 내 조직의 지향점이라서 그런 건가.

비응급환자 이송과 허위전화들을 실적과 통계로 잡지 않으면

혹여 조직이 축소라도 될까 봐 걱정하는 건가.

실제로 화재는 매년 건수와 피해액이 감소하고 있으니까.


구급지도의사협의회에서는 119에 신고가 들어온

모든 환자는 잠재적 응급환자라고 가르친다.

술 취한 상태로 내원한 환자의 머리를 검사했더니

외상으로 인한 걸로 추정되는 혈전이 발견되었다거나,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뇌손상, 2차 감염 등

소수의 케이스를 들먹이며 환자의 이송을 권장한다.


소방경(일반직 6급 상당)으로 승진했는데

앉힐 자리가 없다고 떠밀리 듯 구급 팀장을 맡게 된,

한 번도 구급차를 타 본 경험이 없는 구급 팀장님들께서는

대부분 같은 철학을 공유하셨다.


소방서에 구급대원으로 들어온 게 죄라고.

가족처럼 대하라고.

민원 들어오면 알아서 하라고.

이왕 일하는 거 한번 이송해주지 그랬냐고.


이런 사람들 밑에서 일하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번 폭행사건을 통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유쾌하지 않음이 강한 불쾌감으로 발전했다.

분노의 화살이 내 조직을 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딱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밥벌이의 고단함은 모든 직장인의 공통분모니까.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벨소리가 들린다.

지령서에 적힌 신고 내역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 지번 앞 / 남자 쓰러짐 주취 추정 / 신고자 흥분상태


나는 한 숨을 내쉬며 차량에 탑승해 사이렌을 크게 울렸다.

현장은 예상한 바와 같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이전 04화 <4> 내 안에서 꿈틀대는 회의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