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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o Apr 10. 2021

<4> 내 안에서 꿈틀대는 회의감

특별찰이 센터로 찾아왔다.

형사소송을 위해 조서를 써야 한다고.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나와 주임님이 마주 앉았다.

내 발언보다 과거의 유사사례에서 문장을 참고하여

재작성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주임님께 이후의 처리과정을 물었다.


검찰에 기소되면 형사재판이 열릴 거고

소방활동 방해죄를 적용할 것 이란다.

방해죄라길래 뭔가 약해 보인다는 말을 했더니

이게 형량이 공무집행 방해보다 세단다.


공무집행 방해

;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


소방활동 방해죄

;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


이 과정은 수개월이 소요된다고 하니

이제 마음 편히 기다려달라는 말을 했다.

혹시 사과하면 받아줄 의향이 있냐고 물었다.

전혀 없다고,

가해자가 강력한 처벌을 받았으면 한다고 대답했다.


여기저기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자꾸만 전화가 왔다.

구급팀에서 영상을 공개해도 되냐고 물었다.

어디다 쓰려하냐고 묻자 교육자료로 쓰겠단다.

싫다고 실랑이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이런 걸로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답은 자기들끼리 정해놓고 통보만 하는 상황.

근무하면서 지긋지긋하게 봐왔던 업무 하달 방식이다.


며칠 후 뉴스에서 내 폭행영상이 공개됐다.

그것도 공중파 9시 뉴스에.

사전에 내게 통보는 없었다.

그나마 얼굴이 모자이크 된 것이 다행이려나.


나는 개인적으로 폭행피해를 당한

동료를 몇 알고 있다.

그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는 게 있는데

자신이 당한 일을 가족에게 알리기 싫다는 것이다.

자랑스럽고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아들이자

행복한 직장에서 존경받는 아빠이고 싶지,

취객에게 손찌검당하고 고통받고

동정받는 모습 따위 보여주고 싶지 않단다.


가장 꼴 보기 싫었던 건 인터넷 댓글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의견을 주장하는 댓글이

최다추천을 받은 게시물을 보고 착잡하기만 했다.

현장에서 만나는 민원인도,

환자 인계받는 의료진도,

하물며 조직 내부에서도

처우개선이니 비응급 환자 절감하려는 모습은

보여주질 않는데 댓글로 말 지어내기는 참 쉽구나.


수없이 반복되는 사건사고에도 공염불만 외운다면

그건 관심이 없는 게 맞다.


소방청은 구급대원에게 관심 없다고

청와대 청원이 올라왔었던 일은

두고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230732


매년 200건이 넘는 구급대원 폭행사건.

어떤 시도에서는 호신장구를 휴대하고

어떤 시도에서는 폭행 예방체조를 교육하던데

의도는 좋다만 실효성은 글쎄다.

삼단봉과 전기충격기가 지급돼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고

폭행 예방체조는 누가 봐도 코미디 수준이었으니.


뉴스나 소방본부에서나 사례에 대해 다루면서도

정작 피해자에 대해서는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대책이 시급하다는 말로 기사와 문서를 마무리하지만

사건이 이슈가 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폭행당한 구급대원의 수는 늘어만 간다.


성과평가와 줄 세우기 좋아하는 양반들이

이런 수치에는 참 둔하다.


슬픔은 어느덧 분노의 마음으로 변했고

분노의 방향도 가해자 보다 나의 조직으로 향했다.

나는 왜 이런 데에 왔을까.

나는 왜 이런 업무를 할까.

나는 왜 이런 사람들과 일을 할까.

10년간 공들여 쌓은 탑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었다.


나의 분노는 이미 이성을 잠식한 상태였고

화살은 엉뚱한 곳을 향했다.


현장에서 민원인과 말섞을 일이 적은

운전요원의 업무가 부러웠고 ,


야간근무 내내 출동이 없어 잠을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난 화재진압요원이 부러웠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온전히 주말을 쉬는 내근직원이 부러웠다.


이 조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는 나 하나뿐인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직장 내에서의 대인관계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의 평판은 최하로 떨어졌다.


누군가 폭행에 관한 말을 꺼낼까 봐 사람을 피해 다녔고,

모임에서 누군가 업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내뱉어

그 상황을 종식시켰다.


손가락이 잘린 사람이 팔이 잘린 사람 앞에서

감히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있냐며.


나는 괴물이 되어갔다.

불친절로 인한 민원은 차곡차곡 쌓여갔고

나는 잘 못 한 거 없다며 속된 말로 '배를 쨌다'.

본서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간부회의마다

내 이름은 폭탄처럼 회자됐고

구급 팀장과 센터장이 나를 어떻게 할지

대책을 고심해달라고

소방서장이 직접 '꼽'을 줬다고 한다.


폭행이라는 불씨는

마침내 나라는 존재를 전소(주 1)시켰고

나는 끔찍한 화상을 입은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주 1) 전소 [全燒]

: 건물이나 물건이 불에 모두 타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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