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o Apr 10. 2021

<6> 마음에 새겨진 푸른 멍

업무를 하는 내내

마스크로 가려진 나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육두문자가 흘러나왔다.


"또 이 사람이네.. 아저씨! 어제도 신고했잖아요!!"

"술 깨는 약이 세상에 어딨어요. 택시 타고 집에 가세요. "

"병원이 환자 받기를 싫어하네? 돈 벌기 싫은가??"

"경찰관님, 노숙자를 왜 우리한테 떠넘기십니까?"


... 순화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다행히 생각이 성대를 거치지는 않았다.

혼잣말이었다는 얘기다.


간혹 거친 언행을 하는 주취자가 있거나

왜 이렇게 늦게 왔냐, 세금 받고 일을 대충 한다,

말투가 불친절하다 따위의 항의라도 받는 날이면

가슴이 뻐근해지며 견딜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에 자주 의지했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화끈거리는 얼굴은

약이 아니면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의존성이 심한 약을 멀리하려 했지만

중독되듯 약을 찾았다.

근본적인 업무와 환경은 변할리 없고

약으로 버텨 가며 할 앞날을 상상했다.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부정적인 생각은

내 안에서 꽃과 열매를 피웠다.


소방청에서 심리상담사를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다.

상담을 받으며 나의 상황과 심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습니다' 수준의 조언만 들었으니까.


폭행을 당해본 적도, 욕설을 하는 사람에게 굽신거려 본적도,

분초를 다투는 응급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었을 상담사에게

공감받길 바라고 위로받기를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다.

치료법을 소개하고 감정의 피드백을 제공하는 사람들이지만

죄송하게도 그 당시의 내게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취미를 갖고 운동을 하는 건 물론이고 쇼핑도 해봤다.

백화점에서 일시불로 브랜드 옷을 구매하고

값비싼 그래픽카드를 사서 게임도 해봤다.

온라인 게임에 현질도 크게 해 보았지만, 즐거운 건 그때뿐이었다.


야간근무를 하는 주간이면 하루의 일부분은 계속 회사에 머물렀다.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있거나, 회사 출근을 앞두고 있거나.

내가 요양하겠답시고 오랜 기간 휴가를 가면

야간근무를 단 둘이서 해야 할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다른 팀원에게 야간근무를 연속으로 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평판이 안 좋은 나는 내근부서로 갈 수도 없었다.

선진국에서 운영하는 구급대 4조 2교대로 전환은 요원하다.

막막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이가르닉 효과'라는 게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끝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게 되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긴장 상태가 이어지고,

그러다 보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된다는 효과.


폭행을 당했을 때 반격을 못한 것이 아쉬웠다.

따지자면, 할 수도 없었지만.

언제 열릴지 모르는

형사재판의 결과만 기다리고 지금의 상황.

자이가르닉 효과 때문인지 내 머릿속은 온통

폭행사건과 소송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가해자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나는 이렇게 힘든데.

나는 언제까지 구급대원으로 일 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이렇게 힘든데.


폭행을 당하기 전 나는 매달 들어오는 월급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텨내던 평범한 직장인A 였다.

요즘 유행어로 '금융 치료'는

직무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리니까.

사건 이후로는 월급이 들어와도 무덤덤하다.

이거 벌려고 이렇게 고생한 건가.


폭행사건을 거치고 난 후 나의 '복무염증'은

이제는 '복무 패혈증'으로 발전했다.

10년간 해왔고 앞으로 기약 없이 매진해야 할

내 업무에 대한 회의감이 느껴졌다.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커져가는 회의감이.


나중에는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한 거지'라고 할 정도로

말실수를 하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이 잦았다.

분노의 감정, 슬픔의 감정.

내가 그동안 느끼지 못한다고 없는 게 아니었다.

지박령처럼 내 머릿속에, 내 마음 안에.

나의 말과 행동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부정적인 정서는 날이 지날수록 차곡차곡 내 안에 적립되었다.

나는 이게 뭔지, 어떻게 없애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우울과 불안은 헤엄치는 오리발처럼

교대로 나를 괴롭혔다.

이전 05화 <5>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