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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o Apr 10. 2021

<8> We’re in the endgame now

'어벤져스-엔드게임' 영화를 보면 타노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집단상담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공감을 이루면

치료효과가 크다고.


행정팀 담당자가 폭행사건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자료를 취합해야 한다며 단체메일을 보냈다.

문제는 단체메일 보내며 '숨은 참조'를 안써서

내 동료들 중 어느 누가 폭행을 당했었는지

모두가 알게 됐다는 거다.

거 참... 프라이버시인데 신경 좀 써주면 안 되나.

그중에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소방관이 24시간 맞교대 하던 시절부터 구급차를 타시던

최고참 주임님의 이름이 수신인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연락을 드려보았다.

어찌 된 일이냐고, 괜찮으시냐고.


주임님께서는 119 구급차를 이용해서 

요양병원에 입원하려는 요청을 거절했단다.

아픈 곳 없이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는 도와드릴 수 없다고.

그러자 옆에 있던 보호자가 어깨를 밀치며 욕설을 하더란다.

이 정도의 폭행은 지난 세월 동안 수도 없이 겪은 일이라며

그 당시에는 보고를 안 하고 넘어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깨를 밀친 보호자가 항의 전화를 하는 바람에 사건이 알려졌다.

적법한 절차에 의해 이송 거절했음에도 항의가 들어왔기 때문에

소명을 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현장활동 동영상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 후 폭행사건으로 정식으로 보고가 되었다고.


20년 경력의 주임님께서도 요즘은 힘들다는 말씀을 하셨다.

예전에는 구급차만 태워줘도 감사하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일반인들의 눈높이가 너무 높다고.

민원이라도 들어오면 동료를 대역죄인 취급하는

조직의 분위기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고.

성형외과가 없다, 풀 베드다 말하며 튕기는 병원에

환자 인계하기도 여간 힘들다고.


내가 민사소송을 진행한다는 얘기를 듣자

고개를 갸웃하시더니 곧장 힘내라며 격려를 해주었다.


응급구조사 1세대인 주임님께서는

경력과 인품으로만 따지면 소방청 구급과장이 되셔야 될 분이셨다.

하지만 행정업무는 귀찮고 현장이 좋다면서

20년이 넘도록 구급대원으로만 근무했다.


당신께서 보직변경을 생각해본 적도 없지 않았지만

내 한 몸 편하자고 조직에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했다.

소방차에 50대 아저씨들만 타면 어디 불이나 제대로 끄겠냐며.

디스크 터진 허리와 삐걱대는 무릎으로 누구를 구조하겠냐며.

너털웃음을 짓는 주임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직감했다.

아, 저게 10년 후의 내 모습이겠구나.

씁쓸한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나는 주임님처럼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도

업무와 조직에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출동지령 소리는 나를 현실세계로 소환했고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으니 업무가 수월할 리 없었다.

나의 언행은 필터링을 거치지 못한 채

거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었고

나는 '민원 유발자'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사람은 상대방의 말과 행동은 잊더라도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느끼게 해 줬는지는 잊지 않으니까.




어느덧 인사철이 되었다.

보직을 바꿔달라고 인사담당자에게 고충을 토로했다.

도저히 버티기 힘들다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다른 업무도 해보고 싶다고.

경력직으로 임용된 특별채용자는 의무적으로

해당 업무에 종사해야 할 의무 복무기간이 있다.

나는 그 기간을 한참 넘겼다.

화재 진화사, 소방차운용사 등의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기에

내가 다른 보직을 맡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사담당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보직변경은 불가하다'는 답변을 건넸다.

이유인즉, 자리가 없다고.

내가 근무할 자리도, 내 자리를 대신할 누군가도.

멀쩡히 자기 보직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을

어느 날 갑자기 (기피 보직인) 구급대원을 시킬 수 없으며,

구급 특채로 임용되지 않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구급업무를 하고 있는 직원들도 아직 많다면서.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말을 했다.


 - 반드시 다른 보직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어요?


'적응장애'라는 병명이 적시된 진단서를 제출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인사상 불이익이 있을까 싶어 망설였다.

불이익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다.

신경정신과 진료받는 게 소문이 나고

수년이 지난 후에도 내가 어딜 가던지 이상한 꼬리표가 붙는 것.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가고 소방서에는 비밀이 없으니까.


인사 예고안 발표를 앞둔 전날 밤, 센터장에게 전화가 왔다.

센터 내에서 자체 인사를 진행하겠노라고.

서무주임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럼 지금 서무 하는 후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후배를 나를 대신해서 구급차를 태우겠단다.


센터장의 제안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임용시험을 4년 만에 겨우 합격했다며 일을 꼼꼼히 챙기겠다던

경력 1년 차 후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통화는 끊겼다.


다음날 아침 출근했을 때 구급장비 편람을 훑어보며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배를 볼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죠 반장님. 헤헤.

1년 동안 고생해서 업무에 적응하고 행정을 익혔는데

갑자기 연락 와서 내일부터 구급차를 타라고 했으니

그의 마음이 좋을 리 없다. 얼마나 내가 싫었을까...


업무가 바뀐 후 정신없이 몇 주가 흘렀다.

구급업무를 맡은 후배의 얼굴은 나날이 핼쑥해졌다.

초반에는 후배가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 주임님!! 진짜 힘드네요. 이런 거는 어떻게 해야 돼요?


나 때문에 구급대원이 된 후배를 볼 낯이 없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내가 구급차를 안타는 기간은 아마도 6개월 정도 일 것이다.

현재의 센터장은 다음 인사 때 다른 소방서로 발령이 날 것이고

새로 오는 센터장과 인사 주임님이 지금 이 상황을 묵인 할리가 없다.

6개월이란 시간은 열악한 환경에서

조직이 내게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업무는 생소했지만 적응은 쉬웠다.

전임자가 본인이 작성했던 문서들을 잘 정리해둔 덕분이고

소방서의 업무는 창의적이거나 새로운 일이 별로 없다.

업무환경이 변하니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이렇게 사람이 간사하다.


시간이 흘러 내가 접수한 민사소송 재판이 열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법원이란 곳에 가봤다.

가해자는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고

나 혼자 원고인석에 앉은 채로 재판이 진행되었다.

판사는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질문을 몇 번 하더니 재판을 마쳤다.

내가 들인 수고와 시간들에 비해 허망하게 재판이 끝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판결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를 끼친 사실이 인정되니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내가 제기한 위자료보다 상당 부분 감액되어 판결이 나왔다.

가해자는 판결 결과를 알고 있을까?

수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나는 위자료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가해자의 주소가 불분명하여 송달이 되지 않아  

그의 주민등록 초본을 발급했을 때 이런 상황을 예상하긴 했다.

그의 최근 4년간의 주소지가 죄다 고시원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인지대를 포함한 소송비용을 고스란히 날렸다.

가해자는 부동산이나 동산 같은 재산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어

재산명시 신청을 하는 게 의미가 없었다.

이마저도 비용이 발생하는 건 덤.

통장을 압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후의 과정은 혼자 진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채권추심업체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본 게임인 소송보다 '엔드 게임'인 위자료 받아내기가 더 어려웠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는 본인의 의무를 행하지 않음으로써

또다시 자신의 죗값을 '문서상 갈음 처리' 했다.

가해자의 집행유예 처분을 처음 알았을 때 느꼈던

기분 더러운 무력감을 다시 느꼈다.


민사소송이라는 제목을 가진 복수극에서 나는 완벽히 패배했다.

아, 위자료를 지급하지 않아 버리면 어쩔 수 없는 거구나.


그 날은 집에 일찍 들어와 혼자 술을 마시며 늦게까지 TV를 보았다.

상황이 차근차근 정리되고 있었다.

법리적으로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돈과 시간을 잃었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을 테니까.

이제는 나 자신을 돌보는 데만 힘쓰자.

그동안 애썼다.


구스타프 쿠르베의 회화 '상처 입은 남자'.

그날 밤 잠든 나의 얼굴이

아마 그림 속 남자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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