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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o Apr 10. 2021

<10> 감사의 언어가 주는 울림

"고맙습니다"


대면 업무를 하는 119 구급대원은 숱한 감사인사를 받는다.

홈페이지에 '칭찬합시다' 게시판을 따로 운영할 정도이다.

심폐소생술로 회복된 사람이 퇴원한 후 센터에 찾아올 때나

임산부를 이송하고 난 후 아기가 건강히 태어났다는

연락을 받을 때면 큰 기쁨과 함께 보람을 느낀다.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굳이 119를 이용하지 않아도 병원에 갈 수 있는,

솔직히 말해서 응급실을 왜 가는지 모르겠는

비응급환자들이 건넨 감사 인사는 썩 개운치 않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방문하면

빨리 진료받을 수 있을 거 같아서 119를 부른 사람.


걸을 수도 있고 자가용이 있는 보호자가 있는데

구급차로 모시는 게 낫지 않겠냐며

119로 불러다 대리 효도하는 자녀분들.


누워서 생활하는 만성 와상환자로써

사설 구급차 부르는 비용이 아까워서 119를 부른 사람.

(응급실에 누워있다가 외래로 가서 예약된 진료를 받고

집에 갈 때는 사설 구급차 타고 집에 간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이다. (과연!?!?)

그들이 건넨 말에는 못 된 심리가 깔려 있다.

택시나 사설 구급차 비용을 절감했다는 안도감이.

 

그래서 구급차를 한 번도 이용하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이용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시민의식 결여로 국가에 무형의 피해를 줄지언정

어쨌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고 아픈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응급환자보다는 경증환자가 업무 하기 편하다.

병원 역시 업무 로딩이 짧은 그들을 선호하기에

의료진에게 인계하기도 수월하다.


나를 돌아버리게 만드는 건

상습적으로 119에 아프다고 신고하는 악성 민원인들이다.

지난 신고 내역이 모두 단순 주취 환자 회복이었어도

119에 전화해서 나 아프다 와달라 고 하면 출동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진짜 아플 수도 있으니까. 어휴.


강XX.

수년째 사나흘에 한 번꼴로 119에 신고하던 그 사람.

일지를 작성하다가 인적사항을 외워버리게 된 그 사람.

항상 술에 취한 상태로 고성을 질러대던 그 사람.


강 씨는 답이 안 나오는 상습 신고자였다.

위장관 출혈을 앓고 있어 언제든 응급환자가 될 수 있는...


기초수급비용이 나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의 집에서는 술파티가 열렸고

만취한 강 씨는 출혈 섞인 토사물을 게워내곤 했다.


병원비를 내지 못해 쫓겨났다며

이송해준 응급실 앞에서 다시 신고하기도 했고,

길거리에서 거하게 술 취한 상태로 신고해서

구급대에게 귀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 관내의 골칫덩이였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강 씨를 만나며 의도치 않게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됐다.

일용직을 전전하는 강 씨는 아침에 일자리를 못 구하면

(강 씨가 말하길 이런 걸 '대마찌' 난다고 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술을 먹는다고 했다.

안주는 오직 컵라면.

가족도 있었지만 절연하고 혼자 산 지 오래됐다고 했다.

그의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는 단 3개.

인력사무소, 주민센터 복지과, 술친구 박 씨.


어느 날 그의 집주소로 출동지령이 내려왔다.

평소와 달랐던 점은 본인이 신고한 게 아니라

경찰의 공동대응 요청이었다는 것이다.


출동 지령서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았다.

행정 입원이었다.

정신질환자로 추정되며 자·타해 위험이 큰 사람을

경찰관이 정신병원에 응급입원을 의뢰하는 제도이다.

이송 중에 응급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경찰이 구급차를 요청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지금이 그런 경우다.

행정 입원 대상자는 강 씨였다.


현장에서 목격한 강 씨의 집은 엉망진창이었다.

컵라면은 쏟아져 있었고

집안 곳곳에 가재도구가 어질러져 있었다.

벽에다가 술병을 집어던졌는지

유리 조각들은 방바닥에 가득했다.

손목에도 자해 흔적이 있었다.

현장을 확인한 경찰은

강 씨에 대해 행정 입원을 결정하고 구급차를 요청했다.


평소에는 강 씨 얼굴만 봐도 짜증이 났지만

오늘은 왠지 측은해 보였다.

아마도 행정 입원을 시키고 나면

당분간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강 씨를 부축해 구급차에 태웠고

경찰이 섭외한 공립 정신병원으로 이송을 시작했다.

강 씨의 의식은 또렷했다.

지금까지 만난 것 중 가장 멀쩡해 보였다.


동행한 경찰에게 물어봤더니 자해할 우려가 있어서

행정 입원을 진행한다고 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경찰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강 씨는 온순한 양처럼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료진에게 환자를 인계해야 했기에

나는 몇 가지 질문을 강 씨에게 건넸다.

나의 질문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던

강 씨는 병원 도착 직전이 돼서야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가 나 때문에 그동안 고생했네.

 수고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고생?? 수고했다고???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도와줄 거 아니면 썩 꺼지라고 소리치던 강 씨가 한 말이 맞나?

그때 내 안에서 꿈틀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구급차를 타며 민원인에게 받았던 감사인사 중에

가장 울림이 있었던 순간이었다.

평소 '술탱이'라고 부르며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던

강 씨에게서 받은 감사인사가 내 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다니.


나는 강 씨와의 시간들을 복기해보았다.

그도 힘든 삶을 겨우겨우 살아내는 한 명의 사람이었음을 외면해왔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내가 내뱉는 차가운 말투를 강 씨가 몰랐을 리가 없다.

경찰에게 붙들려 원치 않는 입원을 하게 되는

지금 이 순간도 그의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


강 씨가 내게 건넨 감사인사에는 진정성이 있었다.

그동안의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강 씨는 어쩌면 나와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르는

찰나에 본인이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임을 증명했다.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건 몹쓸 술기운 때문이었다고.

본인도 존엄한 사람이었노라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인간성은 결국 회복한다는 것.

나락에 빠져 있더라도 주식 차트처럼

어느 순간에는 본연의 인성으로 수렴한다는 것.

일생의 어느 한순간의 단편을 보고

그 사람 자체를 경멸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나의 업은 공직자의 신분으로 응급(일 수도 있는)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고

강 씨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감사하다는 말까지 들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고단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려는 몸짓들.

그 밑바닥을 목격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뿐.

인터넷 화제의 인물인 쿨펀섹좌의 유행어를 빌리자면,

'그것이 구급대이니까.'

내가 그를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 역시도 인생 열차의 아픈 구간을 지나고 있다고 해서

어둠에 집중하고 상처의 결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나면 찾아올

창 밖의 풍경을 상상하는데 힘을 쏟자.




내 안의 트라우마와 싸우기 위해서

내가 그동안 써왔던 방법은

분노의 감정을 있는 힘껏 끌어다 쓰는 것이었다.


무기력한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일은 해야 했으니

부정적인 에너지라도 끌어 쓸 수밖에 없었다.

다만 분노의 방향이 잘못됐다.

시험 보고 면접보고 내 발로 걸어 들어간 회사에 분노를 퍼붓고

맡은 업무가 아예 다른 동료들에게 분노를 퍼붓고

조례와 법률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의 규정에 분노를 퍼부었다.


회사가, 동료가, 규정이 나의 분노를 수긍하고 변화했을 리 없다.

그저 나의 위신과 평판에 악영향만 끼쳤을 뿐.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며 참 많은 일이 있었고 참 많이 힘들었다.

그 사이 2번 재판이 열렸다.  

천사 같은 인연을 만나 행운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조직의 배려로 다른 업무를 경험하며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류시화 작가의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마라’

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 단지 바라봄이 있을 뿐, 보는 나는 없다.

  단지 들을 뿐, 듣는 나는 없다.


현장에서 묵묵하게 지침대로 업무를 수행하는 소방관 A가 있을 뿐

거기다 감정을 싣지 말자. 도움을 건네는 손길에 내 감정을 담지 말자.

내가 꺼내어 쓸 수 있는 감정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사람 알기를 소모품 알 듯하는 곳에서 굳이 소모할 필요는 없다.

소중한 사람들과 교류하기에도 모자란 게 감정이다.


트라우마 관리에 도움이 될까 싶어 많은 책을 읽었는데

그중에 팃포탯 (Tit for tat)이라는 이론이 마음에 와 닿았다.


팃포탯은 직역하면 ‘상대가 치면, 나도 가볍게 친다’는 뜻이다.


이걸 구급현장에 응용하자면,

기본적으로 나는 민원인에게 친절하게 성심껏 응대한다.

민원인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면 아무 문제없다.

하지만 민원인이 엉뚱한 말을 하거나 소란을 피우면

나는 즉시 현장활동을 중단하거나

가용한 자원을 모두 동원한다.

(경찰력을 요청한다던지

 상황실에 무전을 해서 해당 민원인이 추후

 신고하더라도 출동지령을 내리지 않도록

 조치하는 방법 등이 있다)


팃포탯 이론을 활용하면 나는 상대의 행동을 토대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응을 해내갈 수 있단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던 민원인을 살살 어르고 달래서

무난하게 병원에 이송하는 걸 미덕으로 삼았다.

민원이 들어올까 싶어 장거리 병원 이송하고

주취자의 신분증을 확인해 자택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구급업무 지침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다.


처음부터 악한 의도를 가지고

구급대원과 마주하는 신고자는 없다.

대부분의 폭행사건은 술취한 민원인을

구급대원이 어르고 달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팃포탯에 의하면 이런 호구 같은 짓을 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내가 정한 법칙의 선을 넘을 때는

나 역시 그에 호응해 줄 필요가 없다.

평소보다 항의 전화가 더 많이 들어올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시끌시끌 해지겠지만 이제 신경 쓰지 않으련다.

정당한 공무집행이 되도 않는 민원보다 가치 있다.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평판에 신경 쓰고 민원에 벌벌 떨던

과거의 나와는 거리를 두자.

업무처리만 제대로 했다면

민원 따위는 나의 월급을 어쩌지 못한다.


나는 변했다. 걸그룹의 유행가처럼.

여리여리 착하던 그런 내가 

너 때문에 돌아 내가 독한 나로 변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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