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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o Apr 10. 2021

<9> 가시나무에 날아든 파랑새

6개월간 서무업무를 하다가 구급대로 복귀했다.

그 사이 함께 일하는 파트너가 '대체인력' 으로 바뀌었다.

대체인력이란 육아휴직 등으로 업무공백이 발생할 때

단기적으로 고용된 근무자 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여자 반장님이 우리 센터로 왔고

앞으로 6개월간 구급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업무시간의 대부분을 차량 안에서 함께 보내기에

친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부 열심히 해서 내년에 정식으로 임용될 거라고 말하는

그녀의 성격은 쾌활했다.

발랄하다고 해야 하나? 20대 특유의 밝음이 있었다.

남자들만 우글우글하여 칙칙했던 센터 사무실에

농담과 웃음소리가 점 점 늘어갔다.   

그녀는 업무에도 능숙했고 금세 우리의 손발은 척척 맞아 들어갔다.

주간 근무 있던 어느 날 나는 구급대원들 만의 회식을 제안했다.

그 자리는 2차, 3차까지 이어졌다. (코로나 이전의 일이다)


 “그런데 반장님, 그 사건은 어떻게 처리됐어요?”


회사 얘기는 의도적으로 안 하고 신변잡기만 늘어놓던 술자리에서

그녀가 나의 폭행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업무 파악하려고 컴퓨터에 깔려있는 문서들을 보다가

폭행과 관련된 동향 보고서와 자료들을 보게 되었단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폭행사건에 대해 물어봤다.

괜찮냐는 걱정도 많았지만

단순히 소송 결과를 궁금해하는 호기심도 많았다.

친분을 떠나서 나는 모두에게 대답을 흐렸다.


그랬던 내가 그녀에게 그동안의 정황과

속마음을 주절주절 털어놓았다.

와우, 미스터리.

여행지에서 잠깐 만난 동행에게

속엣말을 고백하는 배낭여행자의 심리였을까?

인연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진솔하게 상대에게 내면을 말할 수 있는.


수년간 (혹은 수십 년간) 공직에 함께 근무할 동료들에게

차마 내 안의 독버섯처럼 자라난 시뻘건 마음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실체 없는 소문이 삽 시간에 퍼지고

평판조회 전화가 수십 통씩 걸려오는 곳이 여기다.

차마 내가 속한 조직에 대한 험담과 회의감을

적나라하게 썰 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결국 이 모든 게 제 얼굴에 침 뱉기니까.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다.

알고 지낸 지 열흘 조금 지난 그녀에게.


 “ 아.. 어떡해요.

  이런 일이 저한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진짜 무섭네요. ”


걱정 말라고. 내가 반장님만큼은 꼭 지켜줄 테니까.

이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녀를 택시 태워 보내고 나서야 정신이 말짱해졌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이 없으면서

그녀에게 나 자신의 밑바닥까지 노출해버렸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음료수를 마시며 이 생각 저 생각하던 찰나에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에 잘 도착했노라고, 힘내라고.

메세지를 읽다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아, 고마운 사람.




그녀는 현장에서 가끔 아찔한 상황을 연출했다.

밝고 진솔한 성격이 때론 독이 되었다.

교통사고가 초보운전자 보다

어느 정도 숙련된 운전자에게 많이 일어난다더니...

업무지식과 응급처치 술기는 훌륭했지만

아픈 사람을 대하는 화법 약간 아쉬웠다.

시간이 자연히 해결해주겠지만...

악성민원과 진상에 의한 시달림을

아직 겪어보지 않았던 탓이다.

현장에 이상한 공기가 감돌 때면

내가 앞장서 바닥을 길 정도의 저자세로 민원인을 달랬다.   


그녀와 함께 하는 동안만큼은

민원이 안 들어오도록 무던히 노력했다.

긴급자동차 업무범위와

허위신고로 인한 공무집행 방해 운운하며

악성민원인과 대립각을 세우던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요즘 유행어로 ‘순한 맛’ 이라고나 할까?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119 구급대원으로 활약할 그녀에게

앞으로 버라이어티한 시간들이 펼쳐질 텐데,

적어도 첫 단추는 잘 꿰어주고 싶었다.

내가 겪은 끔찍한 사건이

부디 그녀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했다.

 

동종업계에 종사할 그녀에게도

언젠가는 힘든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면 예전의 어느 한 때에

참 좋은 사람들과 재미있게 구급차를 탔었노라고,

미소 지으며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동안 내게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먹어가며 근무시간을 그저 버티기에 급급했던 내가

출동이 없으면 짬짬이 잠도 자고 식사도 잘 거르지 않았다.

내 상태가 온전해야

그녀의 실수를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덕분인가?

물가에 내놓은 딸을 걱정하는 아비의 심정으로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정작 도움을 받은 건 나였다.

누군가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내 가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부성애라고나 할까?


그녀와 함께한 6개월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계약기간이 만료돼 이제는 그녀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센터 직원 모두가 짧았던 시간을 아쉬워했고

그녀는 고마웠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시간이 많이 흐른 현재까지도 

긍정적인 에너지내 안에 남아있다.

그녀의 내게 끼친 영향임이 분명하다.

고단할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생겼다.

그녀가 내 안에 심어둔 버팀목이다.


가시나무같이 삭막했던 내게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든 파랑새.

짧은 기간 머물다 떠나면서

그녀는 내게 작은 새싹을 선물했다.

햇볕을 양분삼아

언젠가 꽃을 피워낼 것 같은 아름다운 새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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