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o Apr 10. 2021

<7> 형사재판과 민사소송

폭행사건이 있은 후 4개월 만에 형사재판이 열렸다.

법정에서의 치열한 법리적 다툼 같은 건 없었다.

애당초 재판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조차 없었다.

인터넷으로 판결문을 확인했다.


피고인을 징역 X개월에 처한다.

다만, 이 판결 확정일부터 Y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판결문을 읽는 동안 이게 뭔가 싶었다.

가해자는 벌금형보다 센 징역형을 선고받긴 했지만

집행이 유예됐다.

집행유예가 강력한 처벌이라고는 하지만

이게 과연 실효성이 있는 걸까?

가해자는 대체 어떤 피해를 입었을까?

차라리 벌금형이라도 선고됐으면 좋았을걸.


마음을 가다듬고 재판 진행사항을 살펴보았다.

가해자는 탄원서와 반성문을 제출하고

국선 변호사도 선임했다더라.

반성문? 난 그런 거 받은 적이 없는데.

재판부에 잘못했다고 자필 반성문 같은 거 쓰기 전에

나에게 먼저 사죄하는 게 순서 아닌가?

탄원서는 가족들과 지인들이 썼을 테고.

국선 변호사는 가해자의 무엇을 변호한 건지 궁금했다.

심신 미약? 나의 불친절로 인한 우발적인 행위?


아쉬웠다. 

내가 재판장에서 판사에게 주먹을 날리면

나에게도 집행유예를 선고할까?


어쩔 수 없음을 애써 받아들이며

미리 작성해둔 소송장에 판결문을 첨부했다.

다시, 민사소송이 시작된다.

내가 책정한 위자료를 

법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는지가 관건이었다.

위자료 500만 원에 심리치료를 포함한 병원비 50만 원, 

그 외 상해진단서 발급비용과 교통비 등을 모두 더해

600만원 정도의 금액을 위자료로 산정했다.

증빙서류를 첨부하여 소송장을 접수했다.


피고의 주소가 달라 소송장이 전달되지 않았다고 하여 

주민센터에서 피고의 주민등록 초본을 발급받고

소송장을 수정하라는 보정명령을 받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변호사나 법무사의 도움 없이 혼자서 모든 걸 챙기느라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가해자에게 정의구현을 하리라는 거창한 생각은 없다.

속된 말로 '깽값'이라도 받아야겠다는 마음뿐이다.

내가 고통받았던 시간들 이상으로 

가해자에게 합당한 피해를 주고 싶은 마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 나를 보고 미소 짓지 않았을까.

용서와 화해 같은 유한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다.

이게 피해를 입었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복수를 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은 자가 복수심과 분노에 의해

그보다 더한 행위를 하는 걸 방지하는데 의의가 있단다.

상대방에 의해 눈을 다쳤으면 똑같이 눈을 다치게 하는 것 

그 이상의 행위를 금지하기 위해 만든 함무라비 왕의 법. 


죄의 형량은 판사가 정하고 위자료 역시 판사가 정한다.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잖은가.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내 손을 떠났고 

앞으로의 결과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폭행당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술 취한 그의 주먹질이 아무리 세더라도 저항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 역시 성인 남성이고 충분히 반격을 할 수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죽여버리고 싶었다.

폭행은 이내 멈췄고 나도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들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그를 말리고 있는 운전 주임님, 동료의 얼굴이었다.

내가 여기서 똑같이 주먹을 휘두르면 저 형님도 곤란해지겠지...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부양해야 할,

내가 이런 일을 당했는지 몰랐으면 하는 사람들이.


'화이트 타이거'라는 넷플릭스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범죄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주인공에게

이미 가족에게 다 설명해놨으니 받아들이라고.

만약 그때 주인공에게 가족이 없었다면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조리한 처분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진실을 폭로할 수 있었을까?


내가 딱 그런 상황이었다.

내게 주먹을 휘두른 가해자에게 똑같은 응징을 가하고 싶었지만

많은 것이 나를 만류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사소송은 다르다.

적법한 테두리 안에서 행하는 정당한 복수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어느 날 가해자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로 찾아오지 않고

본서 민원실로 찾아왔다.

자신은 이미 죗값을 치렀는데 너무하지 않냐고.

화를 내기도 하고 읍소하기도 하였단다.

다행히 민원실에서 근무하던 주임님께서

그를 잘 타일러 돌려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민사소송을 제기했다는 말을 듣고 

내근 부서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소송을 취하하라는 언질은 없었다.

다만 나에게 '이상한 놈'이라는 프레임에 

'독한 놈'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도움이 못되면 남의 일에 신경이라도 꺼주던가.

내가 작성한 소송장을 보내달라고 하는 이메일도 받았다.

자기도 구급대원인데 참조하겠다며.

기가 차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전 06화 <6> 마음에 새겨진 푸른 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