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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현 Oct 07. 2022

아직도 코로나로 고군분투 중입니다

2020년 코로나는 밉살스럽게도 슬그머니 왔어요. 

금방 갈 것 같았던 코로나는 미적거리며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꿰차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소상공인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어요. 사스나 메르스도 코로나처럼 이렇게 양심 없지는 않았죠. 코로나는 생존의 위협을 주었습니다.     



= 처음 코로나가 왔을 때는 마스크를 쓰면서도 사람 만나는 것조차 꺼려했어요. 


저는 칼국수집을 하고 있어요. 11평 남짓의 아주 작은 가게입니다. 

코로나 이후 사람들은 넓은 가게를 당연히 선호합니다. 작은 평수에 테이블이 10개나 있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우리 가게에는 코로나가 치명타입니다. 코로나가 왔다고 해서 갑자기 규모를 늘릴 수도 없었습니다.     



코로나로 위기감이 한껏 높았던 5월 어느 날, 춘화 언니가 불쑥 내일 코로나 검사를 하겠다고 했어요. 며칠 전부터 몸이 이상하다고요. 별생각 없이 “네 검사 잘하고 오세요.”라고 퇴근길 인사를 했지요.

8시에 출근해 주방에서 육수 끓이고 겉절이 김치 버무리고 수육 삶고 보리밥 5가지 나물 데치고 무치고, 홀 청소를 말끔히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에 춘화 언니 전화를 받았어요.    


 

“사장님 코로나래요 어떻게 해요.”     


66살 띠동갑 춘화 언니는 저보다 더 주인 같아 제가 회장님!이라고 농담도 하는 직원이에요.

전화기 너머로 “어떡해요?”라는 음성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미안함이 전해졌어요.

누구보다도 저와 우리 가게를 생각하는 마음을 알기에 


“언니는 괜찮아요!” 언니가 더 걱정이에요. 나이가 젊으면 모르겠는데 나이가 많으셔서 그것도 걱정돼요. 

언니!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세요. 여긴 걱정 말고요.”


그렇게 전화를 끊었지만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 머리가 하얘진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으로 몸이 굳어버렸어요.       



지금은 상관없지만 코로나 초기에는 환자만 다녀가도 썰물처럼 휑하던 시절이었어요.

오죽하면 망원동 어느 칼국숫집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만으로 손님이 뚝 끊겨

김정숙 여사가 방문했다는 뉴스가 나올 때였으니 까요. 코로나 확진과 관련해 우리 가게가 인터넷에 뜨는 순간 그 칼국수집과 다름없을 거라는 것을 불을 보듯 훤히 알 수 있었어요. 

매장에서 드시던 손님이 다 나가실 무렵 얼른 밖에 커다랗게 써 붙였어요.     


“주방 공사로 오늘 휴업합니다.”     



= 슬픈 마음을 애써 참으며 밝게 썼습니다 



직원을 제 차에 다 태우고 노원구청으로 갔어요.

줄을 나래비로 서있는 곳에 우리 직원들과 함께 줄을 서고 코로나 검사를 했어요.

내일 9시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에서 꼼짝 않고 있어야 했어요. 보건소에서 역학조사단의 전화가 왔어요. 

“코로나 걸렸다는 직원과 통화 후 문을 닫았고 직원들 모두 검사를 받게 하고 집에서 대기 중이에요”라고 대답을 하니 초기 대응을 잘했다고 칭찬을 하더군요. 그냥 무심히 있었으면 그날 오전 장사는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기 싫었어요. 

내 몸 어딘가에 코로나가 묻었을지도 모르는데 손님에게 서빙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학조사단이 3시에 방문했어요.     



가게 3층의 제 집에서 꼼짝없이 있어야 했고 취준생 아들이 제 핸드폰을 조사단에게 건넸습니다. 조사단은 저의 폰에 CCTV를 보고 춘화 언니와 함께 밥을 먹은 사람을 색출? 했습니다.

밥을 먹을 때만 마스크를 빼니까 밥을 먹을 때를 기준으로 조사했어요. 모두 함께 겹쳤답니다. 저만 빼고요. 묘하죠? 저만 동선이 겹치지 않았네요. 직원들 먼저 밥을 먹게 해서 그랬나 봅니다.      



검사 결과 모든 직원이 음성으로 판정받았지만 보름 동안 자가격리해야 했어요. 출근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 혼자만 괜찮고요. 혼자서 국숫집 문을 연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파출 사무소에서 소개받은 아르바이트하시는 분들이랑 어떻게 보름을 일할 수 있을까요? 손발이 다 잘린 상황에서 말이지요. 코로나로 아무리 손님이 줄었다 해도 식당은 경험 없는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서비스도 엉망진창이 되고 들쭉날쭉해서 아마도 보름 동안 그렇게 했다가는 손님 다 떨어질 일입니다. 차라리 문을 닫을 수밖에요.

      


= 친정 엄마께 달려가고픈 마음이었어요.



슬프게도 보름 동안 문을 닫았습니다. 

처음엔 정말 오랜만에 가게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라 몸이 편했습니다. 

다음날 오후 가게에 내려간 순간 경악을 했지요. 맙소사 어제 장사하려고 솥단지 가득 끓여 놓은 육수는 맛이 변해있었고 준비된 수육도 하나도 못썼으니 모두 버릴 것들뿐이었습니다. 게다가 보름을 버틸 야채는 하나도 없습니다.     



쳐다보기도 싫었습니다. 냉장고를 열어도 한숨만 나왔습니다. 쓸 수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코로나 때문에 휴점을 해야 한다는 것도 비밀로 해야 했기에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지금이라면 그렇게 문을 닫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하지? 쉬는 데 쉴 수도 없고 답답한 마음으로 한숨만 내쉬고 있었습니다. 


   

손발은 자유로운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습니다. 벼랑 끝에 서있는 마음으로 다 상해 가는 야채들을 보니 다시 가게 문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그냥 가게를 처분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지요.  

‘이건 내 탓이 아니잖아’ 하늘에라도 원망하고 싶을 만큼 억울하고 속상했습니다.     



마냥 그렇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뭐라도 해야 했어요. 이 참에 가게를 재정비하자고 하나하나 적어보았어요. 무엇을 바꿀지부터. 우선 우리 가게도 주 5일 근무하는 곳으로 바꿔보자. 브레이크 타임도 만들자. 이 두 가지를 떠올렸어요. 돈을 벌어야 하는 언니들이 급여가 줄어드는 걸 받아들여야 해서 의논을 했어요.  

    


=  11 평 작은 가게에도 브레이크 타임이 있답니다 



코로나 끝나고 출근했을 때 우선 나이가 많은 언니들에게 제안을 했어요.

“언니들 일하는 사람은 일해야지 놀아서 될 일은 아니잖아요. 우리 길게 일해요. 3일에 한번 쉬면 에너지도 충전되니까 3년 더 할 거 6년은 더 할 수 있어요.”

66세 언니들 두 명은 제 말에 동의해 주셨고 다른 직원들도 오케이 사인을 주셨죠.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분은 그분의 의견을 따랐어요. 지금은 주 5일을 수용하는 분만 채용하고 있지요.     



브레이크 타임도 시작했어요. 일 할 시간을 한 시간 줄이려니 손해가 될 거 같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4시부터 5시까지 제한을 두게 되니 손님들께 죄송한 마음이 앞섰지만 지금은 ‘쉬는 시간’으로 자리가 잡혔어요.   


    

窮則通궁측통, 궁하면 통한다고 위기가 지혜를 줬어요. 손님들도 그 시간을 피해서 오시고 직원들은 밥도 먹고 쉬면서 잠시 낮잠도 잡니다. 11평 작은 가게에서 그게 가능해졌어요.

제게도 쉼을 허락하게 됐으니 선물처럼 다가온 시간입니다.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처럼 저도 쉼이 없이 살아왔거든요. 비록 한 시간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힘들었는데 이렇게 적응을 하고 보니 어느새 가게의 격이 한층 높아진 듯합니다. 감히 직원들과 제게 주는 복지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짧은 한 시간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코로나로 소상공인들은 근무시간이 단축되면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처절한 살아남기를 하고 있는 상태이지요. 지금은 제한을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코로나로 인해 고군분투하며 살길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  카멜레온은 아니지만 저희 소상공인들은 변신을 하며 거북이처럼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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