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월 Apr 10. 2022

이별과 청혼 사이의 연인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2021)

이어폰을 공유하는 풋풋한 연인들을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다. “같은 곡을 듣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어폰은 양 쪽의 소리가 다르니까 한 쪽씩 들으면 둘은 다른 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각기 자신의 연인에게 이어폰을 같이 들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교차편집으로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무래도 말해줘야겠어-하고 각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서로를 발견하고는 놀란 얼굴로 얌전히 다시 자리에 앉는다.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스물 한 살 대학생인 키누와 무기가 있다. 두 사람은 막차를 함께 놓치며 인연이 되고, '오시이 마모루'를 계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같은 신발을 신은 두 사람은 좋아하는 장소도, 가고 싶었던 공연도, 즐겨 듣는 라디오도, 영화 티켓을 책갈피로 쓰는 습관도, 가위바위보에서 보자기가 주먹을 이기는 것에 대한 의문까지도 같다. 쉼 없이 대화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막차를 놓쳤다는 핑계로 무기가 가스탱크 영상을 이어붙여 만든 3시간 21분짜리 영화를 함께 보며 아침을 기다린다.


가랑비와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 맞춘 것처럼 꼭 닮은 책장, 갈 예정도 없을 나라들의 여행 안내서들과 가스탱크 영화가 있던 밤을 보내고, 환한 햇살 속에 집으로 돌아가는 키누의 표정은 멋진 꿈에서 억지로 깬 아이같다. 키누는 외박했다며 호들갑을 떠는 가족들의 말을 열심히 무시하며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닫는다. “아깝다. 아깝기 그지없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내 감정을 덮지 마. 아직 어젯밤의 여운 속에 있고 싶단 말이야.”라는 독백이 흘러나온다. 같은 시간 무기 역시 "야마네 씨 그림이 좋아요"라는 키누의 목소리 속을 맴돌고 있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나 드라마 '도망치는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2016)'와 같은 일본풍 로맨스를 연출해왔던 도이 노부히로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가 "있을 법하지만 사실은 그다지 본 적 없는 영화"가 될 것이라 예감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평범하게 특별한 사랑의 생애를 유별난 외부 요인 없이 서정적으로 담아내는 영화는 전형적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생각나는 작품이 많지 않다. 이 작품은 충분히 극적이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관객이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을 만큼 현실에 가깝다는 점이 눈에 띈다. 가령 마음을 확인하기 전 일명 ‘썸’ 단계에서 '그냥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일까? 밥을 세 번 먹고 고백을 안하면 그냥 친구로 남아버린다던데.' 같은 고민을 한다거나, 막차 시간 전에 고백을 하기 위해 남은 시간을 재고 분위기를 고민하는 모습 같은 건 현실의 연인들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다.


시작이란 건 끝의 시작이다. 만남은 항상 이별을 내재하고 있고 연애는 파티처럼 언젠가는 끝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가져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수다를 떨면서 그 애달픔을 즐길 수밖에 없다.
- 키누가 좋아하는 블로그 ‘연애생존율’


무기와의 연애를 시작하고 곧 키누는 즐겨보던 블로그 '연애생존율'의 주인 '메이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사랑은 이별을 내재한다는 주제로 글을 쓰던 사람이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 이 사랑을 하룻밤 파티로 끝낼 마음은 없다. 생존율이 몇 %에 그치는 연애 속에서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쓴지 1년 만에 죽었다. 키누는 자신의 파티는 이제 시작되었고 메이 씨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무기가 잠시 안 보이자 불안해한다. 제목과 첫 장면이 암시했고 모두가 알고 있듯 키누와 무기의 사랑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전철역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 집까지의 도보 30분조차 소중할 만큼 마냥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왠지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날들이 이어졌다"는 무기의 독백을 시작으로 조금씩 다른 길을 걷는다.


그림을 포기하고 취직한 무기의 일이 생각보다 바빠지면서 두 사람의 게임 속 모험은 ‘조라의 마을’에서 멈췄고, 함께 보기로 했던 연극도 출장에 밀린다. 키누는 무기가 '정 그러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싫고, 무기는 키누가 '또야?'라는 표정을 짓는 게 싫다. 두 사람의 신발은 더 이상 같지 않고, 키누가 무기에게 챙겨준 책은 트렁크에 처박힌다. 키누는 연극을 혼자 보러간다. 다소 갑작스러운 것 같은 두 사람의 균열은 그러나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현실적이다.


눈앞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는 무기는 관계의 진전, 결혼을 생각하지만 키누는 이미 조금씩 무언가를 체념하고 있었다. 결혼을 이야기하던 무기는 정작 잘 때는 잘 자라며 뒤돌아 눕는다. 키누는 3개월동안 섹스를 하지 않은 연인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건 무슨 마음인가 생각하고, 무기는 키누가 평생 자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건지 생각한다. 싸우던 중 고함을 치며 무기가 결혼하자고 말할 때, 키누도 무기도 관객도, 이제 돌이킬 수 없이 끝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걸 처참하게 체감한다.


키누와 무기 두 사람 모두 각각 이별을 준비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즐거웠던 하루의 끝에, 4년 전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카페에 앉아 준비해왔던 대화를 시작한다. 무기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키누는 차분하게 오래 준비한 이별을 이야기한다. 함께 살던 집은 어떻게 할지, 키우던 고양이 바론은 어떻게 할지, 가구나 관리비는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듣던 무기는 키누에게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안 헤어져도 될 것 같아. 결혼하자. 결혼하고 이대로 같이 생활해나가자. 오래 생각해왔지만 막상 다가오니 이별을 받아들이기 두려운 무기는 기대를 더 낮춰서라도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고, 키누는 여기서 더 기대를 낮출 수는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아이도 낳고 디즈니랜드도 가고 행복해지자, 무기의 절박한 설득에 키누도 흔들린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두 사람의 이별을 성공시킨 건 옆 자리에 앉은 새로운 연인이다. 4년 전의 키누와 무기를 꼭 닮은 두 사람이, 같은 신발을 신고 서로 좋아하는 걸 이야기하며 풋풋한 긴장과 흥분 속에 대화를 이어간다. 키누와 무기는 그들을 통해 4년 전의 자신들을 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울며 마지막 미련을 내려놓는다. 헤어지고 나서야 다시 그들의 집에는 햇볕이 들고 따뜻한 색감이 돌아온다. ‘버블티를 마시고 있지만 이미 헤어진 두 사람이다’라는 독백은 막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 ‘팬케이크를 먹고 있지만 사랑을 나눈 직후의 둘이다’라는 독백과 같은 톤으로 말해진다.


사랑이 이별을 내재한다는 사실을 고민하며 시작했다고 해서 키누에게 사랑의 죽음이 받아들이기 조금 더 수월하지는 않았다. 무기 역시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혼으로 도망치고자 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사랑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독하게 표현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키누와 무기는 결국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뒷모습을 향해 슥 손을 흔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오늘 전 애인을 만났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랬다면 헤어지지 않았을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어떤 생각을 했을까-를 고민하고, 첫 만남을 떠올리고, 추억 속의 빵집을 생각하지만, 그러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사랑했던 시절은 구글맵 로드뷰에 남아있고, 무기는 이제 키누에게 그걸 알려줄 순 없게 되었지만 바론을 안고 신나게 웃을 수는 있게 되었다. 그 웃음은 제법 다정한 엔딩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처연하게 충돌하는 불협화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