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꼭 낳아야 할까?

사랑이 만들어낸 변화

by 김열매

한국은 현재 초저출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저출산‘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통계 속 숫자에 불과할 뿐, 일상 속에서는 그 심각함이 좀처럼 체감되지 않는다. 뉴스에서는 인구 절벽이니, 국가적 위기니 떠들어대지만, 상황은 해를 넘길수록 악화될 뿐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다.


사실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오죽하면 십 대 시절부터 엄마에게 ”나는 애 안 낳을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까. 나이가 들수록 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연애를 하게 되면 상대에게는 반드시 경고성 멘트를 날렸다.


“우리가 얼마나 사귀게 될 진 모르겠지만, 오래 만나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나는 절대 애는 안 낳을 거야. 애 낳을 생각이 있다면 나랑 연애 시작도 하지 마.“


보통 이십 대 초중반 남자라면 좋아하는 여자가 이런 말을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단 사귀고 싶은 일차원적 욕구에 뒷 일은 생각지 못하고 ”난 애 안 낳아도 돼!“라며 가볍게 넘기기 마련이다.


과거 3년 동안 만났던 X도 그랬다. 아이를 유난히 좋아하던 그는 처음에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내가 언젠가 바뀔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여러 이유로 헤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도 2세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뀌지 않았던 점도 결국 이별의 한 이유였다. 헤어지던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는 손주를 바랄걸. 나는 엄마 설득 못 해.“


애당초 관계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이런 사람이야! 괜찮겠어?“하고 양해를 구했는데, 이제 와서 본인 엄마를 들먹이다니. 결혼 생각도 없었지만, 그날의 헤어짐은 오히려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연애를 시작할 때도 나는 다시 같은 말을 꺼냈다. 아이는 낳지 않을 것이라고. 내 말에 남편은 “강요할 생각 없어. 나는 둘이어도 좋아.”라며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그런 일을 겪은 터라, 그의 말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너는 외동이잖아. 부모님이 손주 보고 싶다고 하시면 어떻게 할 건데?“

“뭘 어째. 내가 안 낳겠다고 하면 끝나는 거지. “


명쾌한 대답이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계속 불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남편은 단 한 번도 2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시부모님께 “2세 이야기는 부담스러워 할 수 있으니 언급하지 말아 달라”라고 미리 당부해 두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제야 남편이 얼마나 내 의견과 가치관을 존중해 왔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둘이서 함께하는 결혼생활은 규칙적이고 안정적이었다. 돌보고 챙길 대상이 없으니,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였다. 딩크부부로 살아갈 우리의 미래가 찬란히 빛나고, 막힘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자 마음 깊은 곳에서 낯선 감정이 일렁였다. ‘자식이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하는 궁금증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아이를 낳고, SNS에 아기들 사진과 영상이 넘쳐났다. 친구들 빼닮은 모습을 보며 신기하기도 하고, 저 조그만 생명이 삶을 바꾼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친구가 올린 아기 사진을 보고 ‘귀엽다’라며 중얼거리는 스스로에게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러지? 난 애 싫어하잖아.“


아이를 낳고 싶다기 보단, 그 존재가 주는 감정이 궁금해졌다. 둘이서도 이렇게 행복한데, 남편과 나의 피가 섞인 자식이 있다면 그건 또 어떤 감정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가정적이고 헌신적인 남편은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잘 수행할 것 같았다.


“우리처럼 외동으로 하나만 잘 키우면 어떨까?”


내가 남편과 2세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남편은 “네가 원한다면 나도 좋아!”라며 긍정했다.

머릿속에는 ‘하나‘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하나의 가족, 하나의 책임, 하나의 생명.

나에게는 너무 낯설지만, 그래서 더욱 끌리는 단어였다.

단순한 호기심인지, 진심의 싹인지 명확한 구분은 어려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외동이다. 어릴 적부터 외동은 외롭다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공감하지 못했다. 혼자라서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지원과 독점할 수 있는 사랑은 꽤 달콤하고 짜릿했다. 외동이 외롭고 이기적이라는 건, 참 단편적인 편견일 뿐이다. 물론 외로움을 느끼는 외동도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셋이라면 더욱 깊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동을 만들어 사랑을 듬뿍 주고 싶다는 욕심이 피어올랐다.




이쯤 되면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나는 확고한 딩크가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나이를 먹으며 가치관이 달라진 걸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남편이 내 남편이라서, 이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은 것이다. 이 남자라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과 믿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남편이라도, 2세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바꾸려 들었다면 거부감은 더욱 거세졌을 것이다.


결국 사람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강요나 세월이 아니라,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을 마구 받으니,

이제는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내려주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선택을 옳다, 그르다 단정할 순 없다.

그럴 자격 또한 없다. 우리 사회는 저출산을 걱정하지만, 단순히 출산을 의무나 책임으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적어도 내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마음이 자라나고 있다.


그건 의무나 책임이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낸 변화의 결과였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