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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Aug 06. 2023

소년 아메드

8월 6일의 기록

정신없이 터지는 난폭한 뉴스에 얼마큼 맞았을 때였을까.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소년 아메드>가 문득 떠올랐다. 청소년보다 소년이라는 말이 아직 어울리는 아메드는 언젠가부터 충성스러운 무슬림 신자가 된다. 이맘이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한 이슬람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소년은, 자신을 오랜 시간 가르쳐온 여선생님과 악수를 거부하고 누나의 옷차림새를 비난하며 엄마를 가리켜 알코올중독자라고 욕한다. 그리고 이맘이 여선생님을 ‘배교자’라고 칭하는 순간, 소년은 그것을 하나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아메드는 칼을 챙겨 선생님의 집으로 향한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관객은 그가 결국엔 휘두르지 못할 거라고 애써 믿지만, 아메드는 기어코 칼을 휘두른다.


서현역 칼부림 사건 가해자에 대한 정보가 나왔다. 역시 그는 개인적인 변명의 구실을 갖고 있었다. 난동하는 칼부림 예고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빈부격차와 사회적 박탈감이라는 낡은 해석이 반복되었다. 사안은 더 심각해지고 사건은 더 빈번해지는데 나아지는 건 없으니 구실이든 해석이든 정말, 궁금하지 않다. 무엇보다 나는 저 두 가지 원인-개인적 변명거리와 사회적 격차-이 이 모든 세태의 이유라고 보지 않으며, 그것들을 뿌리 뽑을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대체 문제없는 사회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밤길은 고사하고 환한 대낮도 두려워 호신용 전기충격기를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리는 없다. 과거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개인주의자들의 아름다운 연대’가 이뤄지는 것이라 들었는데, 작금의 우리 사회는 확실히 개인주의가 우세하다. 다만, 아름다운 연대는 없는, 이기적인 개인주의 시대다.


확실히,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걸 체감한다. 시스템에 대한 믿음은 부서지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리며, 그러니까 ‘사이다’와 ‘역관광’과 ‘사적 복수’라는 키워드가 난무하는 서사가 화려한 꽃을 피우며, 우리는 관용과 연대보다 ‘네가 감히’와 ‘나는 참지 않아’의 감각을 우선하여 몸에 아로새기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을 보면 공동체에 대한 감각과 타인에 대한 존중이 실종 직전에 놓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고 속 안에 넣고 살았던 나는, 종종 제이슨 본이 액션을 할 때처럼 내가 미운 사람들을 때리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나는 점차 깨달았다. 사람이 타인을 그렇게 함부로 아프게 할 수는 없는 거라고. 주먹을 그렇게 함부로 휘두를 수는 없는 거라고. 타인의 얼굴을 마주한 상태에서 그/녀를 해칠 생각을 그렇게 함부로 할 수는 없는 거라고. 한데 비록 장난이라고는 하나,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겠다는 무섭기만 하고 전혀 웃기지 않은 글들이 모두가 볼 수 있는 인터넷에 올라온다. 글쓴이는 공동체를 어떻게 감각하고 있을까. 인권을 무엇이라 여기며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기에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까.


나는 연대에 대한 감각을 전통과 보수주의적 가치관에서 기르지 않았다. 내게 겸손과 자신감과 연대를 가르친 것은 페미니즘이었다. 차이를 차별로 전환하는 사고는 연결되어 있다. 성차별과 인종차별과 장애에 대한 차별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공감과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사회의 가장 보이지 않는 구석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공동체와 연대에 대한 감각이 희미해져 가는 요즘, 학부모들은 성평등 책을 금서 목록에 올리고, 일부 남성은 연애하지 않는 여성을 벌주고 싶어 하며, 사회의 적지 않은 구성원들이 인종차별과 장애차별을 저지르고 ‘이게 왜 차별이야? 너 진짜 비논리적이야!’를 시전한다. 아무도 자기가 서 있는 지대가 누구를 밟고 서 있는 건지 돌아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소년 아메드>를 처음 보았을 때, ‘이건 좀 다르덴스럽지 않은데’라고 생각했다. 소재가 다르덴 형제가 늘 천착해왔던 문제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어제 다시 영화를 보며 깨달았다. 이것도 결국 공동체의 연결을 탐구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그러나 서이초 사건을 비롯한 여러 소식을 접하고 난 뒤여서일까, 나는 아메드에게 내미는 손이 너무, 정말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도움의 손길은 즉각적으로 내밀어지는데, 과연 아메드의 사죄는 진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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