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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Sep 08. 2023

직시와 연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버지스 형제'


“들어봐. 가난한 사람들을 주 차원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이 29퍼센트밖에 되지 않아.”

“알고 있어.” 밥이 말했다. “놀랍지?”

“32퍼센트의 사람들이 인생의 성공은 우리 힘으로 결정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독일에서는 그렇게 믿는 사람이 68퍼센트고.” 짐이 신문을 옆으로 밀었다.

잠시 후 잭이 조용히 물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미국적인 거지.” 짐이 말했다. p.258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버지스 형제>의 핵심은 아마도 저 대목에 담겨 있을 것이다. 미국적인 것, 즉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탐구. 개인의 부단한 노력이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신화는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능력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사회는, 개개인이 처한 계급과 차별이라는 맥락을 지워내기 마련이다. 연대가 뒷받침되지 않는 개인주의 사회는 과연 어떤 민낯을 보유하고 있을 것인가? <버지스 형제>는 ‘생각 없이’ 혐오 범죄를 저지른 열아홉 소년을 통해 이 질문들에 답해 나간다.


메인 주 셜리폴스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열아홉 소년 잭은 어느 날 홀로 범죄를 감행한다. 그의 마을에 들어와 새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소말리족 이민자들의 이슬람 사원에 냉동된 돼지머리를 집어던진 것이다. 햇빛에 녹은 돼지머리는 사원에 핏물 자국을 남기고, 이 광경은 이민자 사회에 큰 충격을 남긴다. 비록 소년에게는 엄마와 이혼 후 멀리 떨어져 사는 아빠에게 자신의 남자다움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말이다. 이민자 사회의 동요가 일면서 미국 전체가 주목하자, 경찰은 이 사건을 혐오 범죄로 규정하고 범인 색출에 나선다. 뉴스가 자신이 벌인 일로 떠들썩해지자 겁을 집어먹은 잭은 엄마 수전에게 죄를 실토한다. 이런 큰 사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수전은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오빠 짐에게 도움을 청한다. 곧, 짐과 그녀의 쌍둥이 밥이 함께 셜리폴스로 돌아온다. 작가 스트라우트는 ‘혐오 범죄’를 둘러싼 격렬한 대립과 분노를 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혐오 범죄가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에서, 잭의 사건을 작지만 큰, 혹은 크지만 작은 것으로 그려낸다. 인물들의 감정은 격노로 일렁이기보다 고요하게 흘러가며, 작가는 중산층을 대표하는 짐, 밥, 그리고 수전이 속한 버지스 가문과 그와 접촉하는 인물들을 통해 ‘평범한’ 미국의 현재를 묘사한다.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인종과 계급 그리고 이민자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버지스 형제>를 읽는 동안 나는, 셀레스트 응과 이창래의 소설을 종종 떠올렸다. <버지스 형제>에는 수많은 화자가 등장하는데 그중 한 명은 잭이 던진 돼지머리를 직접 목격한, 소말리족 남성 압디카림이다. 스트라우트는 그의 목소리를 빌려 낯선 문화에 발을 들인다는 것, 즉 “돌아설 때마다 끊임없이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산다는 것은 “불안감을 키우는” 일임과 동시에 “그의 내면의 무언가를 점점 마모시키는 것”임을 역설한다(169). 이민자로서 압디카림이 느끼는 존재의 축소는 셀레스트 응의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과 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에 등장하는 이민자들의 신경증과 유사하다. 하지만 세 작품, 아니 셀레스트 응과 이창래 / 그리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작품은 본질적 차이를 지닌다. 셀레스트 응과 이창래의 작품이 작가들의 아웃사이더라는 정체성이 투영된 분열적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면, 스트라우트의 작품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인사이더 관점이 장착된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지했듯 <버지스 형제>는 많은 화자에게 목소리를 허용하지만, 종내 작품의 주인공은 밥과 수전, 그리고 짐이다. 어쩔 수 없이 작품의 목소리가 한쪽으로 쏠려 있음을 깨달을 때 내가 즉각적으로 느낀 것은 의심이었다. 뭐랄까, 마치 백인 작가가 백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워 흑인 여성 차별 문제를 폭로하는 소설 <헬프>를 읽을 때 느꼈던 주저함과도 비슷하달까. ‘내가 이 작품을 온전히 기꺼워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버지스 형제>가 <헬프>와 다른 대목은 그것이 백인을 영웅으로 세우지 않으며, 차별을 묘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차별을 저지르는 미국인의 모습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짐의 아내 헬렌이 소말리족에 관한 기사를 읽는 모습이다.     


기사는 케냐의 난민촌에 관한 것이었다. 그곳 난민촌에는 누가 사는가? 소말리족. 그 사실을 누가 알고 있었는가? 당연히 헬렌은 아니었다. 자, 이제는 그녀도 알았다. 이제는 그녀도 메인주 셜리폴스에 사는 소말리족의 일부가 처음에는 오랫동안 믿기 어려울 만큼 처참한 환경에서 살았던 것을 알았다. 헬렌은 소말리족 여자들이 땔감을 모으기 위해 무법자들에게 강간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난민촌에서 먼 곳까지 돌아다녀야 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여러 차례 강간당한 여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품에서 굶어 죽은 자식들도 많았다. 살아 있는 자식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학교라는 것이 없었다. 남자들은 둘러앉아서 잎사귀-카트-를 씹으며 계속 취해 있었다. 남자는 아내를 네 명까지 둘 수 있었는데, 그 아내들이 육 주에 한 번씩 배급받는 쌀 조금과 식용유 몇 방울로 간신히 가족을 먹여 살렸다. 기사에는 물론 사진도 실려 있었다. 땔감이나 커다란 플라스틱 물동이를 머리에 인 앙상하고 키가 큰 아프리카 여자들, 찢어진 방수포가 덮인 진흙 오두막, 얼굴 주위에 파리떼가 우글거리는 병든 아이. “끔찍해.” 그녀가 말했다. 도러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잡지를 읽었다.

끔찍한 일이었고, 끔찍한 기분이 들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을 걸어서 폭력이 난무하는 자기들 나라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왜 케냐까지 가서 그런 지옥 같은 환경에서 고통을 당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누군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거지? 헬렌은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그 기사를 읽고 싶지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멋진 (비싼) 휴가를 즐기고 있는 이곳에서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p.85~87     



도덕적인 책임은 나누어지지 않은 채, 나쁜 사람이라는 비난은 피하면서, 자기만의 안락한 공간에 있고 싶어 하는 헬렌의 마음은 사실 미국 중산층만의 것은 아니다. 오늘날 누군가의 차별적 발언을 지적했을 때 종종 돌아오는 대답은 ‘네가 예민한 것이다’는 문장이다. 내가 옳지 않다는 도덕적 비판은 감수하고 싶지도, 누군가의 상황에 깊이 공감해 보려는 의지도 없는 이들을, 우리는 매일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마주한다.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널리 퍼진 무신경함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걸까. 공동체에 대한 감각이 희미해지면서, 주변부에 위태롭게 몰려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부터는 아니었을까.   <버지스 형제>는 정치와 윤리적 기준에 목을 매는 태도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때로 그러한 강경한 태도는 타자의 미개함에 비한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만 치켜세우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예시로는 밥과 그의 전부인(ex) 팸의 대화가 있다.     


“나도 그래! 당신은 그 사람들 생활 방식을 존중하고 싶겠지만 어떻게 그런 걸 존중할 수 있겠어? 물론 의학계에서도 논란이 있어. 그 여자들 중 일부는 아기를 낳은 뒤에 거길 다시 꿰매고 싶어 하는데 서구권 의사들은 내켜하지 않아. 솔직히, 밥. 그건 좀 미친 짓이잖아. 그 책 쓴 여자가-이름을 뭐라고 발음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진실을 밝힌 것 때문에 살해 협박을 받았대. 놀랄 일도 아니지. 왜 말이 없어?”

“왜냐하면, 첫 번째로 팸, 언제부터 그렇게 됐어? 나는 당신이 그 사람들 기생충이나 정신적외상을 걱정하는 줄 알았는데…”

“걱정해……”

“아니, 아닌 것 같아. 그 책은 우익의 꿈 같은 책이야. 모르겠어? 이제 신문은 안 봐? 두 번째로, 난 잭의 공판이 열린 그 법정에서 소위 미쳤다는 그 사람들을 봤어. 그런데 그거 알아, 팸? 그 사람들은 미치지 않았어. 그들은 지쳤어. 그들이 지친 건 어디 북클럽에서 그들의 문화 중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부분만 가려내서 읽고 그것 때문에 그들을 싫어하는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이기도 해. 트윈타워가 무너진 뒤로 무지하고 나약한 우리 미국인들이 가슴 밑바닥에서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게 바로 그거야. 그 사람들을 싫어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 것.”p.436~437           


결국 스트라우트가 말하는 건 텅 비어 있는 이념에 기대 누가 더 옳은지 겨루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제대로 살펴보기를 원한다. 아메리칸드림과 연결된 개인주의의 ‘능력 있는 특출 난 개인’ 몇몇이 아니라 주변부에 몰려 있는, 고유한 계급과, 인종과, 성별과, 문화를 간직한 개인들을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똑바로 마주 볼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 마음을 토대로 공동체를 일구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압디카림은 재판장에서 사시나무처럼 손을 떨던 어린 잭의 모습을 보고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 청년 말이야.” 어느 밤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재커리 올슨, 그 청년 때문에 마음이 아프구나.”

하웨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처벌을 받는다잖아요. 연방검사가 벌을 줄 거래요. 에스테이버 목사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요.”

어두워진 방안에서 압디카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땀이 얼굴에서 목으로 흘러내렸다. “아니, 그 청년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말이야. 너는 못 봤지. 신문에서 봤던 모습과 달랐어. 그냥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그리고 부드럽게 말을 끝냈다. “아이였어.”

“우리는 지금 법이 있는 곳에 살고 있어요.” 하웨야가 달래듯 말했다. “그 사람은 법을 어겨서 겁을 먹은 거고요.”

압디카림은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법이 있건 없건,”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공포를 일으키는 건 누구에게도 옳지 않아.” p.360~361     


법정에서 압디카림이 목격한 건, 단지 자신의 죄 때문에 겁을 먹은 청년이 아니라 그 짧은 평생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경험만 축적해 온 주눅 든 청년의 모습이었다. 주위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지 않은 적이 없으며, 아빠에게서 자전거도 못 타는 아들 녀석으로 찍힌, 무엇보다 폐쇄적이고 구두쇠 같은 엄마의 미지근한 사랑 표현을 받아 온 청년. 배움이 모자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제대로 판단한 경험이 없는 남자아이. 압디카림은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잭의 본모습을 포착하고 그에게 연민을 품는다. 그리고 그 연민이, 한 가정에 평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스트라우트가 보여주는 개인에 대한 직시와 연민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애초에 소외받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만이 정직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압디카림이 잭에게 마음을 쓴 건 그 자신이 비웃음을 당하고 두려워졌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밥이 잭에게 신경을 쓰는 건, 그 자신의 존재가 배척당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경을 쓰는 건? 제각각의 이유겠지만, 적어도 <버지스 형제>를 읽었다면 짐이나 헬렌, 혹은 팸의 자리에 서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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