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진은 단순히 추억을 남기거나 일상을 기록하기 위한 사적인 물건이 아니었다. 사진의 의미는 책장에 꽂혀 있는 두꺼운 앨범이 아닌, 사람들이 오가는 컴퓨터 액정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사진을 인화하지 않는, 예쁘지 않은 사진은 조용히 삭제하는 셀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p.38
나의 첫 셀카는 중학생 때, 아빠 핸드폰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찍은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본 연예인 사진과 벌써 핸드폰을 갖게 된 친구들이 찍은 셀카를 보며, 나 역시 셀카를 찍고 싶어졌다. 이리 와서 포즈 좀 제대로 취해보라고, 웃어보라고, 잔소리를 하던 엄마의 카메라는 그저 피하고 싶었는데 웬걸, 손안에 쥐어진 카메라 렌즈를 보고는 자연스레 턱 각도가 조정되고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집 거실 창이나 소파를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누가 내게 필름 카메라 사진과 핸드폰 셀프 모드 사진의 차이를 알려준 건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정확히 파악했다. 셀카는 ‘추억을 남기거나 일상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얼굴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그랬다. 나는 얼굴을 자랑하고 싶었다. 주위 어른들이 우리 엄마를 봐서 내게 해주는 “아휴, 참 예쁘다”가 아니라 또래 친구들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안경 쓰고 한창 볼살이 오른 내 민낯으로는 힘들지만 안경을 벗고 조금 갸름해 보이는 얼굴로는 가능할 것이라 여겨졌다.
내 또래의 친구들이 그랬듯, 나는 학창 시절 많은 셀카를 찍었고 그것을 때로는 프사에, 때로는 싸이월드에 전시했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평가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는 셀카 찍기를 아예 멈춰버렸는데, 이력서나 여권에 필요한 사진을 집에서 해결해 볼 요량으로 카메라 버튼을 눌러댄 걸 제외하면 정말, 내 얼굴을 어딘가에 내보일 심산으로 사진을 찍은 적이 지금까지 대략 10년간 없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셀카를 찍을 때마다 나 자신에게서 소외되는 듯한 느낌을. 셀카 속의 나와 현실의 나는 단지 보정으로 인한 물리적 차이뿐 아니라 인격에도 차이가 있는 듯했다. 그 해사한 미소는 평소 ‘시니컬’하다는 평가를 받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좀 더 예뻐 보이는 조명을 찾아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셀카를 찍는 나를 누가 꼴값 떤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내가 셀카 찍기를 관둔 가장 큰 이유는 그 무렵 접한 페미니즘 때문이었다. 차마 언어화할 수 없었지만 늘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내가 시선을, 특히 남성의 시선을 아주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야 내가 남성적 시선으로 나 자신을 평가하고 있으며, 그런 기제를 내면화했음을 보다 정확히 깨닫게 됐다. 내 상태를 알게 되자 더 이상 핸드폰 카메라를 작동시킬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사진 속의 내가 내 얼굴이 아니라 평가되어야 할 대상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책 <인생샷 뒤의 여자들>은 제목 그대로 인생샷 찍는 여자들을 탐구한다. 다만, 인생샷 찍는 여자들의 비결을 전수하는 데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저자 김지효는 말한다. “나는 인생샷을 통해 어떤 차별은 차별처럼 보이지만, 어떤 차별은 오히려 잘남이나 잘난 척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324).” 즉, 저자는 인생샷을 찍는 여자들이 자신을 뽐내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그것이 차별의 효과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포함, 인스타그램과 인생샷 문화에 정통한 여성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도출된 여러 사실 중의 하나는 SNS에도 성별 권력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이라는 열린 공간에 자신을 전시하는 여성들은 ‘좋아요’를, 특히 남성 팔로워들의 ‘좋아요’에 신경을 쓴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남성의 ‘좋아요’란, 여성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적 지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셀카에 관한 기존 논의들은 여성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인정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자주 언급해왔다. 그런데 셀카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추상적인 사실에만 있지 않다. 그보다는 시선을 주고받는 구체적인 얼굴들, 즉 누가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누가 타인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지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인스타그램에서 남성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는 모습은 이들이 친밀성을 형성하는 공간에서 오가는 힘의 방향을 보여준다.
흔히 ‘셀카녀’는 혼자 방에 틀어박혀 거울만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상상되지만, 실제로 인생샷은 결코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평범한 셀카를 인생샷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닌 아름다움을 승인하는 권력이다. p.112
저자는 여성들이 인생샷에 집착하는 이유 또한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일부 여성은 현실에서 외모로 인한(혹은 계급으로 인한) 차별의 상황을 자신이 역전시킬 수 없을 때, 온라인에서 새로운 자아를 창출하려 한다. 이때 새로운 자아는 현실과 갈등을 빚어 ‘셀기꾼’이라는 낙인과 비난을 낳기도 한다. ‘셀기꾼’이라는 비난은 ‘성괴’, ‘강남미인’ 등과 같은 멸칭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다. 이 공격적 단어들은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자원(외모)을 새로이 획득해(혹은 획득한 척 해)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한 이들에 대한 징벌이다(어쩌면 질시일 것이다). 심판자들은 이따금 윤리적 이유들을 끌고 오며 자신의 언사에 대해 변명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외모가 엄연한 사회적 자원이자 차별의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외모지상주의는 여성들이 목숨을 무릅쓰고 성형하고, 또 민망함을 무릅쓰고 보정된 사진을 올리게 할 만큼 실체가 있다. 특히 SNS에 자신의 실제 얼굴과 몰라볼 만큼 다른 사진을 올리는 여성들은 어쩌면 온라인에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애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셀카 보정은 허상의 이미지를 이용해 인정을 받아보려는 헛된 시도나 한심함이 아니라, 온라인의 관계를 통해 그것과 이어져 있는 오프라인 삶을 재조정해보려는 영리한 시도이기도” 하다(142).
저자: 김지효/출판사: 오월의 봄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한편, 저자의 논의는 페미니즘을 통해 SNS문화를 살피는 것을 넘어 SNS에서 페미니즘이 이야기되는 방식까지를 포함한다. 이 책이 진정 흥미로운 이유다. 기실 SNS상 여성들의 문화를 논할 때 페미니즘은 빼놓을 수 없는 의제다. 작가 김지효는 설명한다. “20대 여성들은 디지털 페미니즘 운동의 ‘주역’이자 인생샷 문화의 주 참여자다. 무엇보다 둘 모두 20대 여성 중 일부에게만 알려진 하위문화가 아니라 또래 집단 전반에 영향을 미친 대중적인 실천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182).
김지효가 소개하는 SNS상 페미니즘이 드러나는 방식, 다시 말해 인생샷과 페미니즘이 혼용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일부 여성은 아름다운 이미지를 전시함으로써 페미니즘 의제를 ‘친절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페미니스트를 부르는 ‘멧퇘지’와 ‘쿵쾅이’라는 멸칭에서 알 수 있듯, 안티 페미니스트들은 못생긴 여자들이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해 남혐에 빠진다는 가설을 본인들의 신념이자 상대에 대한 공격으로 이용한다. 일부 여성들은 이 가설의 오류를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아름답고 늘씬한 모습을, 남자에게 사랑받을 만한 여성성을 인생샷을 통해 보여준다. 그렇게 팔로워가 늘고 자신에게 목소리가 부여되면, 이들은 은밀하게 성차별로 인한 문제들을 언급한다. 페미니즘이 일부 여성의 문제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이 정도 문제의식은 모두가 느껴야 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 전략의 장점은 어쩌면 이 전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얘기하듯, 페미니즘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 반응을 완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의 단점은 페미니즘을 브랜드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브랜드화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페미니즘을 브랜드처럼 추구하는 것으로써 이때 여성주의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호소하기 위해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다듬는 데 주력한다. 이렇게 될 때 페미니즘은, 앤디 자이슬러가 <페미니즘을 팝니다>에서 지적한 바 있듯, 대중문화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논제가 될 뿐, 현실 여성들의 삶을 바꾸는 행동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우리가 엠마 왓슨의 가슴골 보이는 드레스가 페미니즘이야 아니냐를 논하는 동안,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현실의 절실한 의제는 잊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지효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인정받은 뒤 페미니즘을 은밀하게 전하는 전략은 여성들을 분열시킨다. 실제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의 공격을 무화시키기 위해(?) 뚱뚱하거나 못생긴 여성들은 페미니즘 언급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를 멋진 것으로 전유하려는 시도는 다른 여성과의 차별화를 전제하므로 자신을 구제하고 다른 여성들을 누락시킨다. 이들은 남성 중심 사회를 상대로 멋진 페미니스트를 보여주려고 하지만, 사실 그 장면을 다른 페미니스트들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페미니스트 중에는 예쁜 사람도, 못생긴 사람도, 뚱뚱한 사람도, 대학에 가지 않은/못한 사람도, 아프거나 우울하거나 ‘이상한’ 사람도 많다는 것을 말이다. 일부 여성이 학력과 직업, 아름다움을 뽐내며 그것이 페미니스트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할 때, 어떤 여성은 페미니즘의 의제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 누군가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를 브랜딩하려고 노력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여성은 페미니즘으로부터 더욱 멀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전략으로 전통적 여성성을 활용한다. 페미니스트의 이미지가 화려하고 멋진 것이 될수록 그것을 꿈꾸기 어려운 여성들은 거리감을 느낀다. p.292
김지효는 질문한다.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여성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도 왜 여성들은 기준을 바꾸려 하기보다 그 기준에 맞는 모습만을 보여주려 애쓸까?(293)” 하여 그녀가 주목한 SNS상 페미니즘이 드러나는 두 번째 방식은 바로 ‘탈코 인증샷’이다. 여성이 겪은 성폭력에 대한 고백과 논의가 왕성해지면서 여성성은 곧 성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많은 여성이 여성성을 코르셋으로 규정하고,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외적 특징들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긴 머리 대신 숏컷, 치마 대신 바지, 구두 대신 운동화, 그리고 화장을 지워낸 민낯으로 탈코에 참여한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미지의 기본값을 바꾸려 시도했다. 더불어 자신의 모습을 온라인에 인증함으로써, 이들은 자신의 준거집단을 여성으로 조정했다. 즉, 탈코에 도전한 여성들은 이성에게 매력적인 대상이 되길 욕망하는 대신, 동성에게 행동하는 멋진 여성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러한 욕망과 인식 체계의 변화는 분명 해방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탈코르셋 운동에도 한계가 없지는 않은데, 때로 이 운동은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판별해 내는 검열 기제로 작동한다. 일부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제에 저항하기를 원하는 여성이라면 응당 완전한 탈코를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별 권력이 기울어져 있는 상태에서 여성의 주체적 꾸밈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적지 않은 페미니스트가 이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는 꾸밈에 대한 모든 여성의 경험이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뚱뚱한 여성은 때로 여성적인 옷차림을 할 기회를 사회로부터 박탈당한다. ‘너는 아름답지 않으며, 여자도 아니다’라는 차별적인 말을 들은 여성이 치마를 입을 때, 그것은 사회에 대한 순응이기보다 저항적 행위에 가깝다(<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조이한). 또한 어떤 여성은 생존을 위해 의무적으로 자신을 꾸며야 하기도 한다. 이때 이 여성들은 과연 페미니스트 의식을 기르지 못할까? 오히려 불합리한 상황을 더 명민하게 자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 역시 탈코 운동의 한계점을 다음과 같이 짚는다.
탈코르셋 운동은 ‘전’과 ‘후’를 도식적으로 구분해 모든 여성이 아름다움에 대해 단일한 경험을 하는 것처럼 가정하지만, 사실 이 서사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여성은 소수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름다움은 초월적인 억압으로 작동하기보다 각자의 나이‧건강‧인종‧계급‧섹슈얼리티 등 구체적인 몸의 현실과 엮여 드러나기에 모두에게 동일하게 경험되지 않는다. 남성적 시선과 무관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도 있고, 아름다움을 노동과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여성도 있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망 자체를 부정당하며 숨겨야 하는 여성도 있다. 탈코르셋 운동의 이분법적 서사는 다양한 몸의 서사를 누락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p.235
그렇다면 SNS와 페미니즘은 영원히 분열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비록 인생샷을 통한 페미니즘의 한계를 짚고 있지만, 이것은 <인생샷 뒤의 여자들>이 내리는 결론이 아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여성주의는 ‘혁명’이 아니라 일상에 균열을 냄으로써 서구 남성 문명의 틈새를 확대하는 ‘진지전’”이라고 주장한다(<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p.165). 혁명이 아닌, 틈새를 확대하는 진지전으로서의 페미니즘. 이 관점을 토대로 생각한다면 SNS상 페미니즘 논의는 한계를 가질지언정 분명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저자 김지효가 인생샷과 여성의 관계를 탐구한 건 SNS라는 매체가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를 통해 미래를 전망하려 한 것이지, SNS에서 여성이 얼마나 실패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지를 단정 지으려 한 것이 아니다. 김지효는 인생샷을 찍는 여성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욕망을 직시하고 인정할 뿐이다. 더불어 그는 “우리에게는 같이 싸울 공간만큼이나 긴장을 낮추고 놀이할 공간도 필요”할 뿐 아니라 “한 플랫폼에서 보이는 특정한 모습이 이용자의 전부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247)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생샷 뒤의 여자들>은 틈새를 벌이는 진지전이 과연 무엇인지를 명확히 아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