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가 곧 능력?
"&%&^*^하는 A랑 B랑 #(@&#(가 #*@&$한데 #(*@#(해서 #(@#&#$(해요."
재영은 자신이 맡은 반의 학생 이현과 상담을 하던 귀에 설치한 생체 단말에서 알수 없는 소리가 섞여 들리는 것을 알아채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학생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원인을 찾아보니 '통역 대상 정보를 재설정 해보세요'라고 AI OS가 권유했다. 통역 대상인 이현의 출생년도에 맞춰 설정을 해 두었는데,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프로그램이어서 그런지 아직은 엉성한 듯했다. 이현이 평소 또래보다 엉뚱한 면이 있는 것을 떠올리고 한 살 낮춰 출생연도를 재설정한 다음, 이현에게 무슨 내용이었는지 다시 말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자, 조금 민망해 하는 표정과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친하게 지내는 A랑 B가 같은 날 생일파티를 하는데 누구의 생일파티에 가면 좋을까요?"
재영은 마침내 듣게 된 이야기의 내용이 생각보다 별 것 없어 살짝 맥이 빠졌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모든 것이 크고, 무겁고, 날카롭게 다가올 나이이니 그럴만도 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 때까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같이 고민해보자는 이야기로 상담을 마무리하고, 학생을 교실로 돌려 보냈다.
'세대어 통역기'는 얼마 전,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윤민으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단말에 설치한 프로그램이었다. 그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재영은 학생들과 제대로 된 대화가 힘들다는 고민을 토로했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라 '쓰는 말'이 너무 달라서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어를 가르치는 재영에게는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다. 다른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고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학생들이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변화가 빨랐다. 이 단어를 이런 뜻으로 쓰고 있구나를 겨우겨우 대충이라도 파악하고 나면, 그 다음주에 전혀 다른 말로 바뀌어 있기 일쑤였다. 굳이 학생들의 대화에 끼고 싶다거나, 아직은 뒤쳐지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재영은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었고, 그러면 학생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재영이 한창 국어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던 시기에 지구 언어 연합은 사용인구 또는 언어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주요 언어를 지정했고, 얼마 안 가 그 언어들끼리 서로 거의 완벽하게 통역되는 프로그램이 배포되었다. 한국어는 다행히 그 주요 언어에 포함되어 있었다. 성인이 되면 당연하게 무료로 설치하게 된 개인 생체 단말에 자동으로 기능이 추가되어, 길어봤자 5초 정도의 딜레이로 상대의 언어로 된 문장이 자신의 언어로 실시간으로 통역되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각 국가의 언어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 되었다. 정확한 언어를 구사해야 통역의 정확도가 높아져 상대에게 정확한 의미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오랫동안 주요과목으로 여겨지던 '영어'는 자연스레 선택과목으로 강등(?)되었다가 점점 선택하는 학생의 수가 적어져 비주류 과목이 되어 버린 시대였다.
주요 언어 통역 프로그램이 개발된 비슷한 시기에 'AI’ 과목이 주요과목으로 신설되었고, 그 담당으로 재영의 학교에 부임해 온 것이 윤민이었다. 윤민은 AI 프로그램 개발자로 일하다가, AI 과목 교사가 부족해져 국가 사업으로 추진된 특별 채용으로 교사가 된 케이스였다. 늘 교사가 되고 싶었던 윤민이 정작 진로를 정해야 했을 때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뒤늦게 기회가 오자 그는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 다만 그렇게 교사가 되고 난 후에도 본인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를 늘 고민했다. 언젠가 교사들끼리 가졌던 회식 자리에서 모든 뒤치다거리를 하고 나서, 같이 국밥을 먹다가 나누다가 알게 된 이야기였다. 재영은 그런 고민을 하는 윤민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 날을 계기로 재영과 윤민은 종종 같이 술 한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다.
퇴근 후 닭꼬치에 맥주를 마셨던 날, 윤민이 추천해 주었던 '세대어 통역기'는 주요 언어 통역 프로그램의 업데이트를 위해 개발된 서브 프로그램이었다. 아직 미성년자라 개인 생체 단말을 설치 할 수 없는 청소년들이 온라인에서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의 의미를 분석하여 표준어로 바꾸어주는 프로그램이라는 건 신문 기사로 봐서 알고 있었다. 아직 표본 수집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나름 도움은 된다는 윤민의 후기였다. 윤민은 사용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피드백이 조금이라도 늘어나니 점점 정확해질 것이라는 예상도 덧붙였다. 재영은 자존심이라고 부를만한 무언가가 깎여 나가는 걸 느끼면서도, 당장의 필요가 더 컸기에 집에 가는 길에 프로그램을 생체 단말에 추가했다.
재영은 점점 세대어 통역기에는 적응을 해 나가다가도,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실시간으로 통역되는 내용과 학생의 입모양이 대부분 달랐기 때문이었다. 마치 뻥끗거리는 입술과 목소리가 미묘하게 매칭이 안 되는 더빙 영화를 보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통역기 덕분에 대화가 아예 안 통하는 경우는 눈에 띄게 줄었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있는지가 의문이 들었다. 이현처럼 개인 상담을 하고 나서 나갈 때 '선생님, 나중에 봐요.' 라는 말조차도 통역되어 들리는 걸 보면 흔한 인사말도 그들만의 언어가 있는 듯 했다. 개인 생체 단말은 인식한 목소리와 최대한 비슷한 음성으로 통역한 문장을 들려주었지만, 재영은 학생들의 진짜 목소리를 제대로 귀기울여 듣고 있는지 자꾸만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세대어 통역기는 유용했기에,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부지런히 피드백을 보내며 사용했다.
여느 아침과 다를 것이 없었는데, 재영은 조용히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다행히 10분 정도 늦었을 뿐이었다. 그보다 알람시간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는데도 울리지 않은 것을 보니, 아무래도 개인 생체 단말에 이상이 생긴 듯 했다. 출근하는 길에 보건 센터에 들러서 진단을 받고 교체를 할까 생각했지만, 오늘은 졸업식이니 상담을 할 일도 없고,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아서 그대로 집을 나섰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학교는 왁자지껄 했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아이들은 통역되지 않은 외국어 같은 말을 건네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재영은 10명 남짓의 학생들에게 졸업장을 나누어주고 간단한 인사말을 한 다음 교무실로 돌아왔다. 자리를 정리하고 바람도 쐴 겸 나온 운동장에는 꽃다발을 든 아이들이 친구들과,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재영은 자신의 이맘때쯤을 떠올리며,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것들도 꽤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A, B 사이에서 사진을 찍던 이현이 재영을 알아보고 가볍게 달려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현의 입은 들리는 그대로의 목소리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양으로 움직였다.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은 아직 더 있다고 재영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