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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Dec 22. 2022

수신자 불명

하나,

 주말 사이 마음이 저 밑으로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일이 있었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뭐라도 붙잡으려고 펜을 잡고 떠오르는 대로 써 봤어. 처음으로 주제 문장을 받았어. 평범한 듯 멋진 문장들이었다. 그 문장들 주변을 빙빙 돌며 뭐라도 떠올려보려고 끄집어내 보려고 했는데 말이야. 당최 무얼 써도 내 마음 같지가 않았어. 더 속상해지 않으려고 내 마음이 멀리 달아나버린 것 같아. 어떤 위로나 긍정의 말조차도 가 닿을 수 없게.

 뭘 써도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난 어떻게 해야할까. 글도 아무 소용 없을까.

 너한테 묻고 싶었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어. 지금은 12시 38분이거든. 아니, 시간이 늦었다는 건 사실 핑계야. 너한테는 거짓말을 잘 못하니까. 그렇다고 마음에 있는 진짜 말들은 더더욱 못하니까.




둘,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쓰기로 했어. 글을 쓰려고 하니까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얼굴들이 생각보다 많아. 그런데 누가 먼저 온 사람인지 무엇부터 처리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무엇부터 풀어나가면 좋을까. 실은 밝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여기엔 근심 많은 사람들 천지야.




셋,

 연기를 왜 하는지 네가 물어봤던 적 있잖아. 그땐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건지 멋있어 보이려고 그렇게 답한 건지 모르겠는데,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 같다고 내가 말했지. 그런데 연기를 하면서 오히려 더 선명해진 건 그 사람들이 아니라 내 마음 같아.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사람을 쥐 잡듯이 잡으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얘기 들어봤어? 아무리 상대방의 잘못이 명백하다고 해도 도망 갈 쥐구멍 하나 정도는 남겨줘야 한다는 말이래. 안 그럼 쥐도 고양이를 문다나. 그런데 누가 고양이고 누가 쥐인지는 누가 정하는 거지.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쪽이 고양이가 아니라 쥐일 수도 있잖아. 수세에 몰려 화가 난 고양이가 쥐를 무는 그림은 어쩐지 너무 익숙하지.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했나 싶은 생각도 드는 거야. 쥐구멍. 지금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나 싶은 거야.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걸 아는데도.




넷,

 이런 얘기들 말고 쓰고 싶은 게 많았어.

밑이 터진 모래주머니 같았던 위태로운 시절의, 하지만 이제는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

사랑하는 친구의 드레스 투어에 동행한 이야기.

나보다 먼저 늙어버린 흉쇄유돌근과 후두하근과 승모근과 함께 사는 이야기.




다섯,

 때때로 너에게 부칠 수도 없는 편지를 써. 내가 정말 좋아했던 그때의 너에게는 부치고 싶어도 부칠 수가 없거든. 내 얘기로 가득한 편지라 미안해. 만나면 주로 들어줬던 나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지?




여섯,

 극장에 떠 다니는 먼지 있잖아. 언제적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먼지, 조그맣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너무나 조그매서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런데 극장에 조명이 켜지면 그 작은 먼지가 정말 아름답게 반짝거리기 시작해.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고 제자리에서 몸을 비틀며 빛나는 거야.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그게 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상하게 위안을 받았던 적이 있어. 저 먼지에 영원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먼지처럼 사라진다고 하지만 여기 이곳에서 사라지는 건 먼지가 아니라 우리일 거야. 그리고는 영문을 모르고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겠지. 먼지들처럼. 그땐 너도 나도 아픔도 걱정도 후회도 원망도 분노도 없기를. 같은 이름의 우리만 있기를.






<수신자 불명> / 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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