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지만 중국인들은 지난주 노동절 연휴를 늘려서 쓴 터라 대체 근무일이다. 그래서인지 홍챠오 기차역은 인산인해로 넘쳐나던 예전 주말의 풍경과는 많이 다르게 한산한 느낌마저 든다.
BC 333년 초나라 위왕(威王)이 성을 쌓고 붙인 이름인 진링(金陵)으로 불리는 곳, 삼국시대 오나라로부터 동진(东晋), 송, 제, 양, 진(陈)의 수도가 있던 곳, 육조 고도(六朝古都)로 불리는 난징(南京)으로 향하는 기분이 남다르다. 구조 고도 낙양(洛阳), 칠조고도 개봉(开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남당, 명, 태평천국, 국민당 정부도 일시 도읍하였기에 십대도회(十代都会)로도 알려져 있는 2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가 아니던가.
바다처럼 넓은 양청후(阳澄湖)가 차창 밖으로 지나는가 싶더니 쑤저우 북역에 한 번 정차했다. 임시정부가 있던 전쟝(镇江) 남역으로 들어서기 전 난데없이 20여 분을 정차했다가 아무 일 없었던 듯 전쟝을 거쳐 예정 시각보다 30여 분 늦은 9시경 난징 남역에 도착했다. 역사를 한 번 볼 요량으로 너른 광장으로 나오니 광장 저쪽 끝 가장자리까지 걸어가니 지붕 위의 '난징 난짠(南京南站)'이라 쓰인 온전한 글자가 겨우 눈에 들어온다.
난징 남역(위)과 역사 내 통로 벽면 그림(아래)
공자를 알현하다
지하철 10개 노선 중 3호선을 타고 여섯 정거장째 콩푸쯔먀오(孔夫子庙) 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나오자 도로 양쪽에 줄지어 선 프랑스 오동나무(法桐) 가로수의 꽃가루가 후끈한 열기로 달아오른 거리를 온통 흩날리며 뒤덮고 있다.
장개석이 프랑스 오동(梧桐)을 좋아했다는 그의 피앙세 송미령을 위해 남경에 프랑스 오동 3만 그루를 심었는 그 오동일 터이다. 기실 저 나무들은 프랑스에서 온 것이 아니고 오동나무에도 속하지 않은 '현령목(悬铃木)'이라고 하지만, 이 낭만적인 스토리를 깨트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면 그녀를 난징으로 데려가 꼭 프랑스 오동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상점과 음식점들이 늘어선 골목을 지나 과거 과거시험장이었다는 강남 공위엔(江南贡院) 입구를 지나 콩푸먀오 입구에 닿았다. 부자묘(夫子廟)는 동진(東晋) 337년 창건된 학문 기구인 학궁(學宮)에서 시작되어 북송(北宋) 원년(1034)에 학궁을 증축하여 공자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콩푸먀오 현판이 걸린 문을 지나 자공 자유 민손 염옹 재여 자로 자유 등 공자 제자들 像이 양쪽에 도열한 대성전 마당으로 들어섰다. 계단 위 대성전 앞에선 공자(BC551-BC479) 像이 제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대성전 안 벽면에는 만세 사표(萬世師表)라 쓰인 현판 아래 높이 6.5m 폭 3.15의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공자의 대형 전신 초상화가 드리워져 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공자가 가장 사랑했지만 요절한 제자 안회(BC 521-?), 공자의 학통을 계승한 증참(BC 506-BC 436),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BC 483-BC 402), 그리고 아성 맹자(BC 372-BC 289) 등 네 명의 동상은 건물 안 공자 초상화 앞 좌우에 서있다.
애공(哀公)이 "제자 중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안회는 배우길 좋아하고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 단명하여 죽었으니 이제는 없습니다. 그 후로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다니 안회에 대한 공자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대성전 문 앞을 기원 리본을 파는 붉은색 저고리 검은 치마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지키고 서있다. 그 어떤 자본주의 나라보다 더 짙은 자본 냄새를 풍기는 중국의 본모습 중 하나를 대성전 안에서 목도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많은 식당들이 음식값과는 별도로 식기와 수저 사용료를 요구하는 것도 매 한 가지다.
부자묘(夫子廟) 대성전의 공자像/복전을 내고 기복하는 사람들
대성전 뒤 '동남 제일학(東南第一學)'이라는 현판이 걸린 중문으로 들어서면 '금성옥진(金聲玉振)'이라는 편액 아래 주나라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는 편종(编种)이 놓인 명덕전(明德殿)이 나온다. 그 앞마당 좌우에 각각 '앙성(仰圣)'과 '습례(习礼)'라는 편액이 걸린 누각에는 대형 북과 종이 하나씩 걸려 있는데, 그곳에서도 복록수희재(福祿壽禧財) 등 글자가 적힌 기원 패와 '축복 장수(祝福長壽)' '태산쇄복(泰山鎖福)' 등의 글귀가 적힌 자물쇠를 진열해 놓고, 구복자들이 북이나 종을 칠 때마다 치마저고리 차림 여성이 큰 소리로 복을 기원하는 구호를 외친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누가 19:45-4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요한 2:16) 예수님이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을 질책하는 성경 구절이 떠오르며,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마당을 둘러싼 긴 회랑을 따라 공맹노순(孔孟老旬) 제자백가(诸子百家) 등 사상가들과 교육기관의 역사 등을 설명해 놓은 자료들과 명덕전 뒤 전각의 중국 서원 역사 진열관도 한 번 훑어보고 뒤쪽 출구로 빠져나왔다.
골목 식당가에서 우육면 한 그릇과 배와 대추가 들어간 얼음 음료(冰糖雪梨红枣汤)로 허기와 갈증을 풀고 20여 분을 걸어서 호텔에 도착했다. 프런트 직원들이 외국인 투숙객에게 익숙하지 않은지 40여 분이나 걸려 체크인을 마치고 나니 2시가 훌쩍 지났다. 호텔 옆에 22층 높이로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는 남경 해관 건물을 마주하는 우연찮은 기쁨도 맛보았다. 지은 지 십여 년이 못되어 공간 부족으로 별관을 짓거나 새 건물을 짓는 우리와는 달리 중국 여러 지역의 규모 있는 해관 건물들을 볼 때마다 십 년을 넘어 먼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부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국부 쑨원과 프랑스 오동 띠디 택시(滴滴出行)를 불러 남경 Must visit sites 가운데 하나인 중국 국부로 추앙되고 있는 손문의 릉(中山陵)으로 향했다. 모바일 기반 온오프라인 융합 택시 서비스인 띠디는 2012년 북경에서 시작하여 현재 천진 청두 선양 칭다오 항저우 구이양 닝보 난징 샤먼 정저우 우한 창춘 등에서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택시 잡기부터 요금 지불까지 스마트폰 하나로 모두 해결되니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스마트 기기에 익숙지 않은 노인들이나 기계치들에겐 택시 타기도 난감한 세상이다.
난징 시내 북서쪽 쫑샨(钟山)에 자리한 중산릉의 입구에 도착해서 숲 속 도로 사이로 난 아스팔트를 따라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의 릉 아래 위치한 명효릉(明孝陵) 박물관에 도착해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부근 십조역사문화원(十朝历史文化院)은 그 이름과는 달리 이 지역 특산 우화석(雨花石)과 남경을 상징하는 상상 속의 동물 피시우(貔貅) 노리개를 팔고 있어 실망스러웠지만 남경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고 자위해 본다.
이곳 숲 속 도로변에도 프랑스 오동, 기실 현령목 가로수가 무성한 것은 1946년 남경으로 환도한 국민정부 주석 장개석과 그의 부인 송미령(宋美齡, 1899-2003)이 자주 찾았다는 미령궁(美龄宫)으로 불리는 관저가 지척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쫑샨(钟山)에 자리한 중산릉
쫑샨(钟山)에 자리한 중산릉
중산 능원 입구로 들어서서 '박애(博爱)'라고 적힌 현판이 달린 게이트를 지나고 족히 4~500미터의 너른 진입로를 따라 걸었다. 세 개의 아치형 문 위 중간에 손중산의 친필 휘호 '천하위공(天下为公)' 글귀가 적힌 웅장한 릉문(陵门) 아래를 통과했다.
눈앞에 나타난 수백 개의 너른 계단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산 중턱 높은 곳에 자리한 중산릉으로 오르고 있다.
릉문(陵门)과 유사한 디자인의 세 개의 아치형 문 위에 각각 민족 민생 민권이라 적힌 제당(祭堂) 안으로 들어서니 청천 백일기가 그려진 천장 아래 홀 가운데 그의 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어느 황제의 능보다 크고 웅장해 보인다.
1911년 신해혁명에 이어 1912년 쑨원(孙文, 1866-1925)을 임시 대총통으로 한 중화민국 정부가 난징에 세워졌다. 민족 민생 민권 삼민주의의 기치 아래 이민족 나라인 청을 무너뜨리고 근대 신 중국의 기초를 세운 그를 국부로 추앙하여 사후 3년에 걸쳐 너비 6.6km 길이 7km 면적 20 km² 규모 무덤을 조성하고 릉(陵)이라 이름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중화의 꿈 명태조와 신중국 국부 쑨원이 잠들어 있고 메이링궁이 있는 쫑샨(钟山)을 뒤로하고 무쑤위엔(苜蓿园) 2호선 전철역으로 내려왔다. 신지에커우(新街口) 역에서 환승한 후 친화이허(秦淮河) 남쪽 1호선 중화문(中华门) 역에서 내렸다.
자전거와 오토바이 물결에 함께 휩쓸려 응천대가보루(应天大街铺路) 위로 페달을 밟고 위화루(雨花路) 남단에서 강을 가로질러 중화문 성문 앞으로 난 다리를 건넜다. 우측으로 수면처럼 평평한 대지 위에 우아하고 웅장한 자태로 우뚝 솟아 있는 보은사 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곽 안 중화문 앞으로 가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붉은 티셔츠 차림의 젊은 여성 단체 관람객들 틈에 끼여 서서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한껏 시장끼를 돋워 제맛을 느끼게 하려는 걸까? 20여 분을 기다려도 굳게 닫힌 중화문은 열릴 줄을 모르자 기다림이 지루함으로 지루함이 짜증으로 번질 무렵, 뉘엿뉘엿 다가오던 어둠이 온전히 내려앉자, 기대하지도 않았던 공연이 시작되었다.
중화문 성벽은 스크린이 되고 문루는 무대가 되어 배우들의 힘찬 육성과 몸짓, 레이저 3D 영상 등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3중 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무대는 새로와지고 전통악기 연주와 춤사위는 잠시도 눈과 귀가 딴전을 피지 못하게 사로잡는다. '심인중화문(心印中华门)'이라는 제목으로 명나라 건국 이야기를 주제로 주원장을 등장시켜 시민들의 자긍심을 북돋우는 내용인 듯 보인다.
중화문과 '심인중화문(心印中华门)' 공연 모습
명나라가 최초로 수도로 삼고 쌓은 성벽의 13개 성문 가운데 하나로 현존 중국 내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천하제일옹성(天下第一瓮城)'으로 불리는 중화문에서 온몸으로 감상하는 주원장의 서사가 남다른 감흥을 일으킨다.
약 30분에 걸친 화려한 공연이 끝나고 길이 트인 성곽 위로 오르는 관람객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양쪽으로 긴 성벽을 거느린 축구장만큼이나 넓은 문루 위에는 투석기 대포 노궁 등 성벽 방어용 무기들이 해자처럼 성곽을 둘러싼 친화이허(秦淮河) 쪽을 향해 놓여 있다. 강 건너 보랏빛 조명을 받은 보은사 탑이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성곽 안쪽으로 돌아서니 어둠에 묻힌 구시가지와 그 뒤 멀리 빌딩군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벽 위에 칸칸이 전시 공간을 만들어 난징의 역사, 축성기법, 난징 출신 유명인사 등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중 한 전시실에서 난징 남역 홀에도 걸려 있던 배우 하이칭(海清, 1977년생)이 난징 출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상하이 인민공원 중매시장 샹친지아오(相親角)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하이칭(海清)을 닮았다."라는 글귀와 함께 사진이 든 딸의 프로필을 들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중화문 문루 위에서 남경의 밤 풍경을 마음 가득 담고서 불빛에 의지해서 긴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섰다. 곧바로 북쪽으로 뻗은 중화루를 걸어서 호텔로 향했다. 달아올랐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보도, 호젓한 봄날 밤거리를 부부 모녀 어린아이 젊은이 등 난징 시민들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불현듯 "저들이, 내가, 그 누구가 1937년 12월 이곳 난징에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머리를 쳐들며 몸서리치게 한다. 난징대학살, 난징 하면 떠오르고 떨쳐버릴 수 없는 그 잔혹한 역사적 사건에 생각이 미치기 때문이다. 내일에는 난징 Must go sites 중 하나인 '난징대학살 기념관(南京大屠杀纪念馆)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금릉이여 영생하라 중화로의 한 음식점에 들러 허기를 달랬다. 더위와 피로에 지찬 몸은 녹초가 되었던지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을 간단히 뷔페식 으로 들고 자전거를 지쳐 방향과 길을 바로잡아 가며 난징대학살 기념관 입구로 찾아가니 시간은 10시 반으로 훌쩍 흘러가 있다.
기념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입장예약 QR코드를 스캔하니 오늘은 예약이 모두 완료되었다고 알린다. 안내원을 찾아가서 '워먼써 와이구어런(我们是外国人)'이라며 사정을 얘기하자 여권확인 절차를 거쳐 입장을 시켜준다. 예전에는 '내국인 우대(외국인 차별)'가 예삿일이었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외국인 우대 경험을 여러번 하면서 한편 의아하고 한편 흐뭇하다.
무채색 화강석 바닥 회색 벽 잿빛 조각상들 등 기념관 바깥은 온통 무거운 빛깔에 잠겨 있고 내리쬐는 햇빛은 뜨겁기만 하다. 관람객 입구에서 기념관 입구까지 기념관 벽면을 따라 대학살의 참상을 전하는 조각상들이 줄지어 서있다.
"죽은 아이는 돌아올리 없고 생매장된 남편은 영원히 살아오지 못하리 악마같은 적에게 포악당한 아내의 비통한 상처 또한 지울 수 없을 터 오, 하늘이여!"
그 첫번째 '가파인망(家破人亡, Family ruined)'이라는 조각상은 죽은 아이를 양팔로 받쳐들고 넋을 잃은채 하늘을 향해 탄식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가파인망(家破人亡, Family ruined)' 조각상
공습을 피하려 아이 손을 잡고 달아나는 사람과 부모를 잃은 아이, 축 늘어진 여인을 부축하여 땅바닥을 기다시피 도망하는 사람, 봇짐을 메고 아이를 품에 안은채 도망하는 여인, 공습으로 죽은 할머니를 들쳐업은 13세 소년, 죽어 널브러진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갖난 아기, 지팡이를 짚은 80세 노모 손을 이끌고 피의 바다로부터 탈출하려는 아버지, 죽은 아이의 눈을 감겨주는 아버지, 강간 당한 젊은 여인의 절규,...
"순수한 영혼에 묻은 악마의 얼룩을 어찌 지우리, 오직 죽음뿐!"
조각의 설명문은 한결같이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일본군의 흉포한 인간성을 '악마(恶魔, devils)'라는 단적인 글귀로 표현하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서 계단을 따라 거대한 무덤같은 기념관으로 내려가면 한가운데 "遇难者 遭难者 VICTIMS 300000"라는 글귀가 새겨진 화강석이 놓여 있고 희생자들 사진이 벽면을 가득 채운 넓은 대형 홀의 어둠이 참배객을 엄습해 온다.
일본군의 강동문(江东门) 집단학살 유적과 희생자 장지 위에 세워진 '침화일군 남경대도살 위난동포 기념관(侵华日军 南京大屠杀 遇难同胞 纪念馆)'이라는 긴 이름의 이 기념관은 대지 12만여m², 건축면적 11.5만m², 전시면적 1.8만m² 규모로 1985년 개관한 이래 2015년 12월에 3기 신관까지 완공하여 개관했다고 한다.
기념관에 소장된 20만여 점의 사료가 중일전쟁 시기인 1937년 12월 13일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이듬해 1월까지 약 30만 명을 학살하고 수 만명을 강간하고 약탈한 참혹한 역사를 낱낱이 증언하고 있다.
창살 연살 자살 화형살 생매장 강간 약탈 방화 파괴 등 금수보다 못한 '악마'의 잔혹성과 무자비함에 치가 떨리고 치미는 분노에 저절로 눈가가 젖어온다.
이자건 作 <난징 대도살>
이자건(李自健)이 참사의 산증인인 성운 스님의 의뢰로 1991-1992년 미국 LA에서 그렸다는 대형 기록화 <남경대도살(南京大屠杀)>이 전시실 출구 직전 한쪽 벽면에서 학살의 참상과 일본군의 잔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출구 쪽 홀 벽면에 적힌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后事之师)'라는 경구가 기념관을 나서는 관람객들에게 과거를 잊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다른 쪽 성벽처럼 벽돌로 쌓은 벽면에는 각국 유명 인사들의 애도 격려 참회 당부 등의 글귀가 적힌 동판이 빼곡히 붙어 있다.
예수님 사후 로마군의 공격으로 도륙된 수많은 유대인들의 죽음을 지켜 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 선 것처럼 비통한 마음이 치솟았다. 저절로 눈에 고이는 눈물이 난감하여 마스크를 콧잔등 위로 올려 썼다.
평화 기원상
대학살 '만인갱(万人坑)' 유적을 둘러보고 '和平 Peace'라는 글귀를 새긴 기단 위에 왼팔에 아이를 안고 오른팔로 비둘기를 하늘로 높이 치켜든 여인 동상을 스쳐 지났다. 유럽에서의 나찌즘과 파시즘의 등장, 일본 군국주의의 전개와 주변국 침탈, 항일 투쟁사, 2차 세계대전의 발발 경과 종전에 이르는 사실과 관련 유물을 전시한 '항전승리 기념관'의 철창 속에 갇힌 전범들의 사진을 뒤로하고 기념관을 빠져나왔다.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중국인들과 우리 민족을 비롯한 세계인이 맞이한 상처 투성이 승리의 댓가는 참혹하리만큼 너무나도 값비싼 것이었다. 출구 쪽 벽면에 적힌 시진핑 주석의 염원대로 "정의필승 평화필승 인민필승"의 시대가 오래도록 지속되길 기원할 뿐이다. 어느새 훌쩍 정오가 지났고 난징 거리는 초여름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