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에 도착하니 일찍 하다. 경기도의 영남길 마지막 구간인 9,10코스를 걷기로 한 것이다.
대합실 TV가 동해안 산불 소식을 전한다. 그저께 고성 강릉 인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어 엄청난 피해를 안긴 산불이 혼신의 진화작업 끝에 잦아들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충청과 경기의 경계에서 영남길을 출발하다.
충북 음성 생극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는 곤지암 부근에서 가다 서다 하며 진행이 더디다. 한식을 맞은 주말이니 그럴 만도 하다. 생극 터미널에서 산성리 어재연 장군 생가까지는 5km 남짓 거리이지만 버스가 없다.
생극과 어재연 생가는 각각 충북 음성과 경기 이천시 율면에 속해 행정구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제의 맹점을 탓하며 생극에서 운행 중이라는 택시 8대 중 한 대를 잡아탔다.
영남길 제10구간, 이천 옛길은 어재연 생가에서 안성 일죽면 금산리까지의 9.9km다. 어재연(1823~1871) 장군의 생가는 야트막하지만 얕잡아 볼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지는 팔성산 서쪽에 포근히 안겨 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금압령 이후 프랑스 선교사 9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된 병인박해, 그로 인해 발발한 병인양요에서 어재연 장군은 로즈 제독의 군대에 맞서 광성진을 수비했다고 한다.
어재연 장군과 두 차례의 양요(洋擾)
한편, 미국 상선을 불태운 188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며 침공해온 신미양요, 어재연 장군은 광성진 수비 중 덕진진으로 진격하는 미군에 맞서 싸우다가 백의종군한 아우 어재순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마을 입구의 쌍충연(雙忠淵)이 두 형제의 호국충정을 기리고 있다.
산성 2리 과수원의 복사꽃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마을을 벗어날 무렵 길 옆 풀숲에서 까투리 두세 마리가 얕은 야산으로 호들갑스럽게 날아간다.
고개라고 하기에는 밋밋하고 야트막한 언덕을 구렁이 담 넘듯 지나서 잘 가꾼 복숭아 과수원이 인상적인 부래미 마을로 접어든다. 안불암이라 불리는 석산 2리, 그 마을 입구 안내판의 '부처를 닮은 돌산' 전설은 인색함과 탐욕의 끝이 쪽박이라는 진리를 일깨운다.
길 옆 비닐하우스마다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농로변 개울 풀숲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스프링을 단 듯 다리를 허공 높이 튕겨 올리며 언덕 위로 급히 도망친다.
동행친구 M과 걸으며 나누는 얘기도 스프링을 단 듯 자유롭게 시공을 넘나 든다. 기억이 수학여행에 닿자 공교롭게도 그와 내 얘기가 같은 시기 같은 곳인 40여 년 전 한려수도로 수렴되었다. 산골 까까머리 중학생이 처음 마주한 바다 해운대에 대한 감회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석교촌을 가로질러 흐르는 석원천에 놓인 산양교 자리에는 유복자였던 효자에 대한 전설이 어린 '안 장사 돌다리'가 있었단다. 율면사무소 산업팀 소속으로 보이는 차량은 산양리 마을 골목을 돌며 지붕 위에 단 스피커로 '산불조심' 경구를 내보내며 경각심을 촉구한다.
산양리 골목 주인 없는 백구는 꼬리를 흔들고...
번듯하게 큰 장승이 있는 'ㅇㅇ산업' 정문 옆에 "강아지 두 마리 가져가세요"라는 푯말이 서있다. 그 앞에서 어린 백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따라오려는데, 저번 구봉산길에서 만난 흑구 짝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손사래 치며 돌려보냈다.
골목길에 자란 꽃잔디가 예쁜 산양 3리, 누군가가 강아지 세 마리를 버리고 갔다며 골목에서 기웃거리는 강아지를 데려가겠냐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얕은 구릉을 넘었다.
마을 입구에 환영 아치가 있는 산양리는 마이산에 안겨있다. 하늘은 온통 무채색 구름이 낮게 드리웠고 날벌레들이 길 위 군데군데 무리 지어 윙윙댄다. 망이산성이 있다는 마이산 아래 아담한 규모의 산양 저수지에 강태공 한 분이 홀로 세월을 낚고 있다.
산 위 망이산성은 왜장 가등의 휘하 부장이 건너편 죽산성의 곽재우 장군의 지략에 속아 스스로 물러났다고 해서 패성(敗城)이라고도 불린단다.
고부간 갈등에 얽힌 해피엔딩 얘기가 전하는 밤골 고개를 지나자 거름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온다. 쇠똥구리도 코를 막지 싶다. 지나오면서 숱하게 눈에 띄던 축사와 목장에서 나온 가축 분뇨를 농사철을 맞아 논밭에 두루 뿌렸을 것이다.
물이 맑아 개울에 가재가 뛰어놀았다는 망이산 아랫녘 하산전 마을 얘기는 흘러간 옛 전설로만 남게 된 듯하다. 몰래 사랑을 나누다 들킨 것처럼 비둘기 한 쌍이 길가 풀숲에서 화들짝 놀라며 날아오른다.
논과 밭 사이에 띄엄띄엄 자리한 농가 마당마다 어김없이 주인 대신에 견공 한 두 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다. 진돗개, 도베르만, 시베리안 허스키, 황구, 백구 등 갖가지 모양새만큼이나 어떤 견공은 컹컹 대며 순한 과객을 위협하며 경계하고 어떤 견공은 배를 깔고 누워 낯선 발걸음 소리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산전 마을을 빠져나와 금산리로 접어들며 영남길 제10구간 걷기를 마무리한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시간과 공간처럼 길도 애초 시작과 끝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편리를 위한 방편으로 인간이 구간을 정하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눈앞에서영남길 제9구간 죽산 성지 순례길이 손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