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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 본 Dec 21. 2020

묻어버린 진실을...

나는 자연과 벗하며 지낸 어릴 적 기억이 많다. 연분홍 진달래꽃처럼 무더기무더기 아름답게 피어있다. 그 추억들은 꽃처럼 대부분 어여쁘지만 뿌연 안개같이 어거지로 감춰진 기억이 하나가 있다. 그 그림 속으로 한 걸음 한걸음 들어가 본다.    


이른 봄 아직 푸르른 새싹이 돋아나기 전, 삭막했던 겨울을 헤치고 동네 앞산에 흐드러지게 진달래꽃이 피었다. 그 산에는 여자애들끼리 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 더더구나 혼자는 절대로 가지 않던 산이었다. 가끔 동네 남자애들과 여럿이 어울려 놀다가 용기를 내어 진달래꽃을 꺾으러 가곤 했다. 산중에서 즐겁게 꽃을 꺾다가 저 멀리 이상한 사람의 움직임이 보이면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산에 어린이 간을 빼먹는 ‘용천 배기’가 살고 있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앞다퉈 줄행랑을 치며 도망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한 번도 그런 사람을 거기서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누군가 그곳에 살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병자 들일 수도 있고, 집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마을에는 그 산에서 온 사람일지도 모르는 남루한 차림으로 대문 앞에 서서 음식을 동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듣기로는 마당에 널려있는 빨래를 걷어가는 사람들도 있고 심할 때는 젊은 아낙에게 희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쩌다가 그쪽 동네에 가서 놀다 오면 거기 갔던 사실 만으로 부모님께 크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자연스레 그쪽 동네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 대한 경계심은 점점 알 수 없는 공포심으로 변해 그들에 대한 없는 이야기까지 만들어 비방했던 거 같다.    


그 산 너머 한 동네가 있었다. [kbs 다큐멘터리]에서 그 마을에 대한 숨은 진실을 봤다. 대한 청소년 개척단,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전국에서 1700명 강제 납치해 노역을 시켜 염전을 개간한 사업 이야기였다. 그 프로그램의 증언자들에 의하면 그 당시 강제로 정권을 탈취한 쿠데타 세력이 자신들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반대 저항세력이 저항할까 봐서 청년 세력들을 대부분 잡아다가 개척단이나 국토개발 쪽으로 보내고 억지고 일을 시켜서 저항할 수 없는 세력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국가 순화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모아야 했다는 맥락에서 이런 개척단 사업이 유지하면서 장기간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버렸다고 밝혔다.    

 

납치. 구타. 감금. 착취가 자행되었다. 그들은 갈데없는 고아들이었다. 강제로 허허벌판 폐염전을 개간해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1968년 개척단 해체 후, 보건사회부는 개척단에게 땅을 분배하겠다고 분배증을 줬지만 개척단은 국가의 소유로 넘어갔고 그들은 개간한 땅마저 빼앗겼다. 그들이 가장 억울하고 분한 것은 강제로 잡혀서 온갖 아픔을 겪으며 노역을 한 그들에게  국가가 무단 점유한 땅에 대한 임대료를 내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임대료를 내지 않자 강제로 그 땅을 빼앗아갔다고 했다.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은 깡패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단 점령단도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혹은 진실도 모르면서 들리는 소문으로 그들에 대한 사실을 오보했다. 무서운 깡패들이라고. 끔찍한 죄를 지은 범죄자들이라고. 그들에게 가까이 가면 해를 당할 것이라고.     

사실은 그들은 남의 빨래를 걷어가야 할 만큼 충분히 입을 것이 없었고 남에게 구걸해야 할 만큼 매우 굶주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 동네 젊은 아낙을 희롱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진상을 선명히 밝히겠다는 집념 하나로 버티고 있는 80세를 바라보는 한 노인. 그는 1961년 11월 14일 개척단에 강제로 끌려온 고아 청년이었다.

하숙집에서 자고 있던 그는 해병대원들의 폭력에 잡혀서 트럭에 짐처럼 실렸다.

‘어머니 사랑 정신 보신탕’이라고 쓰여 있는 몽둥이로 죽을 만큼 맞았다고 말했다. 상상할 수 없는 고된 일들, 나무 판자촌, 천막으로 씌워진 허름한 집에서 살았고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노역을 나가야 했다. 그의 동료들은 때로는 뻘에 파묻혀, 영양실조로, 도망가다 붙들려 매 맞아 죽었다고 증언했다.   

  

1962년 17살에 한 처녀는 취직 회유로 납치되어 거기에 강제로 수용되었다고 했다.

구호반이라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서 도망도 못 갔다고 했다. 그녀는 일하는 남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고 강제로 합동결혼식까지 했다고 말했다. 반항하면 매 맞아 죽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얼마나 절망의 피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지금 그녀는 삐쩍 마른 얼굴에 아픈 상처만큼이나 주름살이 깊이 파인 할머니가 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억울하다. 너무 억울하다. 지금 와서 잘못됐다고 미안하다고 사과받으면 뭐하나?”라며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 그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가해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관심은 어떤 형태의 아픔보다 더 그들을 가혹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누군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준다면 그들의 눈물이 덜 쓰지 않을까?   

  

지난 과거를 생각하며 눈물짓던 한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그저 당연한 줄 만 알았다. 못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고아는 그래도 되는 거냐고 묻고 싶다”라고 말했다. 땅에 깊이 묻혀버린 진실을 그들은 밝히고 싶어 했다. “그들을 가해한 사람들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후배들이 웃을 때 혹시 용서될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흘렸던 눈물, 피 그리고 땀으로 일궈온 땅은, 동료의 희생으로 만든 옥토는 그들의 자신이라고 말했다.

“정권 유지와 홍보의 수단으로 만들어진 땅이 국가 피해로 인정받을 때까지 이 땅을 떠날 수 없다.”라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내가 살던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그곳이 나에게 아름다운 고향으로 기억되는 것조차 그들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마치 목구멍 근처에 묵직한 것이 걸린 것처럼. 어서 속히 그들에게 씌워진 거짓의 옷들이 벗겨지기를 바란다. 그들의 진실이 밝혀지는 당연하고 애타는 소망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지난 시간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아픈 세월이지만 앞으로 그들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이라도 행복하고 웃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묵묵히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지켜보았던 그 산은 봄이면 곱게 꽃을 피워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었을까? 춥고 어둡게 떠난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듯이 붉게 그 산을 물들였던 것은 아닐까? 그 산은 모두가 묻어버린 진실을 흐드러지게 핀 꽃으로 못 다 한 그들의 말을 대변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었고 위로하고 있었던 거 같다. 거기서 우뚝 서서 그들의 죽음과 아픔을 아름답게 꽃으로 피우고 있었던 같다. 함께 슬퍼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얼마 전 그곳에 찾아가 봤다. 참 많이 변해 있었다.

그 높던 산은 없어졌고 예전에 산이 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언덕이 되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낮아진 산처럼 흔적도 없이 그들의 아픔의 눈물이 녹아지길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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