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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 본 Oct 25. 2020

엄마의 빈자리

어릴 적 동네 또래들과 놀이는 참 다양했다. 공기놀이, 줄넘기, 술래잡기, 꼬리잡기 놀이, 땅따먹기, 사금파리 모아 소꿉놀이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는 놀이들이 많았다. 그때 일들을 회상하니 입가에 미소가 머문다. 잔디를 깎으면 나는 풀 내음처럼 상큼한 내음이 그리움의 날개를 펴고 그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중에 기억 저편에 남아 조명을 조금만 밝혀도 뚝 튀어나 올 것 같은 놀이가 있다. 사금파리 소꿉놀이다. 3명 이상이면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 먼저 엄마. 아빠부터 역할을 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녀들이 되었다. 서로가 아빠 역할을 안 하려고 했다.  엄마 역할은 더 안 하려고 했다. 나 역시도 그랬다.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자녀 역할을 더 좋아했다. 


어려서 확실히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부모가 되는 것은 힘들다는 걸 알았을까? 

특히, 엄마의 역할은 더욱더 그렇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마다 엄마 역할을 자처하는 언니가 있었다. 그녀는 엄마 역할을 톡톡히 잘해 냈다. 

칭얼대며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들을 옷가지로 포대기 삼아 감싸 안아 주기도 했고 주인 몰래 따온 채소를 흙과 물을 섞어서 사금파리 그릇에 담아 밥을 맛있게(?) 지어 주었다. 다들 그 언니랑 소꿉놀이하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언니 얼굴. 


그때는 의아했다. 왜 다들 마다하는 엄마 역할을 나서서 하려고 하는 걸까? 그 이유를 몰랐다. 아니, 그냥 알고 싶지도 않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많지는 않지만, 간혹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거나 엄마가 도망가서 없거나 한 애들이 있었다. 그 언니가 그랬다. 새엄마 밑에서 이복동생과 같이 자랐다.  그 언니는 그리운 엄마를 소꿉놀이하며 그려 본 것은 아닐까? 


한때 나도 엄마의 부재를 경험한 일이 있어서 그 맘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초등학교(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고1 때 서울로 전학 갈 때까지 매년 겨울방학이면 엄마는 서울로 돈 벌러 가셨다. 그래서 겨울방학이 싫었다. 평소엔 몰랐는데 엄마가 없는 자리는 너무도 컸다. 

아버지가 방에 따뜻하게 군불을 지펴 주시고 작은언니가 먹을 것을 잘 챙겨줬다. 그런데도 엄마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늘 엄마가 그리웠다. 겨울방학 동안, 두어 달이 너무도 길고 길었다. 


끼니때가 아닌데 오빠는 따로 라면을 끓어서 혼자 만 먹으려 했다.  

"달라고 하지 마라." 혼자 먹기도 부족한 내 라면을 셋이나 되는 동생들에게 빼앗기긴 싫다고 미리 바리케이드를 친다. 오빠의 기분을 살피며 슬금슬금 다가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입 만." 밥상으로 빼꼼히 얼굴을 밀고 입을 벌리면 오빠는 마지못해 한입 가득 라면을 넣어준다. 뺏어 먹는 라면이 더 맛있다. 

다정한 표현 잘하는 오빠는 아니지만, 오빠가 입안 가득 넣어 준 라면 가닥을 얌 얌 씹어 먹다 보면 그 사랑의 라면이 목구멍을 어느새 넘어간다.  


그렇게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엄마가 남기고 간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설날이 되면 엄마가 온다. 

달력에 오실 날을 표시해 놓고 하루하루' X '표시를 하며 손꼽아 기다린다. 드디어 엄마가 오는 날이다. 

언제 오실지 몰라 아침부터 목이 빠질세라 마을 어귀를 내다보고 또 본다. 하루 종일 기다린다. 

그날은 그동안 달력에 표시하며 손꼽아 기다려 온 날들보다 더 긴 하루로 기억된다. 저녁 늦게 어둑어둑 해지면 드디어 나타나신다. 


아침부터 긴장된 맘으로 오랫동안 기다려서 마음은 지쳤지만 그래도 좋다. 엄마가 왔으니까. 귤 한 박스를 머리에 이고 내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보고 싶은 엄마의 얼굴을 맘껏 볼 수 있으니까. 만지고 싶은 엄마의 젖가슴을 실컷 만질 수 있으니까. 명절이라 평소에 맛볼 수 없었던 많은 먹을거리가 있어도 엄마의 품만큼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보고 그리 반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내 그리움은 너무도 사무쳐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것 같이 간절한데. 지금 생각하니, 엄마는 아이들을 그리워할 마음의 여유도 없이 각박하게 살아오셨던 같다. 


그렇게 엄마와 좋은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어느새 엄마는 다시 서울로 가야 한다. 설 연휴, 며칠만 잠깐 왔다가 또 일하러 가야 했다. 그렇게 가는 엄마는 얼마나 힘드실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엄마의 치마 가랑이 끝을 붙잡고 흔들며 떼를 쓴다. 혹시 내 말을 들어주려나? 그럴 리는 없지만, 그래도 떼를 써본다. 

"엄마, 가지 마. 안 가면 안 돼. 응응." 나는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 주변을 맴돌면서 떠나지 않고 애원한다. 그러면 엄마는 아주 차갑고 매몰차게 나를 밀쳐내며 이렇게 말한다. 

"이 애가 왜 이래. 가야 하는 거 알면서. 저리 가." 젖 뗄 무렵 엄마 젖가슴을 파고드는 아기가 엄마 젖가슴에 발려진 쓴 약 맛을 보는 것처럼 나는 그 말을 들으면 엄마 곁에서 뚝 떨어지게 된다. 


집안 사정을 잘 몰랐던 나는 그런 매몰찬 엄마가 서운할 뿐이다. 변변치 못한 아버지(엄마 생각) 밑에 줄줄이 자식 넷을 떼 놓고 가는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애들이 학교 안 가는 방학 동안이라도 일해서 아버지의 놀음 빚을 갚을 수 있고 자녀들의 중. 고등학교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다고 엄마는 생각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는 서울 사촌 이모 댁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밤새도록 바느질을 하셨다고 한다. 밀수해서 들어온 밍크를 손질해서 여러 가지 모양의 털목도리와 코트를 만들었다고 하셨다. 얼마나 고단한 나날들이었을까? 


아버지가 가장 역할을 잘해 주셨으면 엄마가 우리를 키우느라 그렇게 고단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해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다가올 때쯤이면 아버지 놀음 빚 갚으려고 논을 파셨다. 한 방 가득 모인 동네 어른들이 만 원짜리, 오천 원짜리, 천 원짜리 돈다발을 주고받았다. 나는 철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 본 그것들을 만져보고 싶었다. 어른들처럼 한 뭉치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한 장 한 장 세어보고 싶었다. 왠지 돈을 보니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엄마는 그때 논을 팔고 얼마나 가슴 터지게 아팠을까? 동네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창피했을까? 남들은 재산을 늘려서 다른 집 논을 사는데 엄마는 있던 논을 팔아야 하는 심정. 


어릴 적부터 나는 그런 부모님의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막연한 행복한 가정을 꿈꿨다. 그래서 그와 어긋나 불협화음이 나는데도 끝까지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을까? 그렇게 엄마의 부재를 경험했기에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없는 서러움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애들의 태도나 옷차림이 맘에 안 들면 "엄마 없는 애처럼"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을까? 아이들에게 엄마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 알았기 때문에 그가 집을 나갔어도, 생활비를 몇 년 동안 안 주었을 때도, 교회 다닌다고 수없이 모멸감을 주었을 때도, 길고 긴 외로운 밤을 보낼 때도, 나는 아이들을 떠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런 결혼생활을 견디는 것이 애들 보고 싶은 그리움을 견디는 것보다 쉬울 것 같았다. 

비록, 좋은 엄마는 못되더라도 빈자리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발버둥 쳤지만 결국 아이들에게 행복하게 해 주기보다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들을 더 많이 남기고 말았다. 부디, 언젠가 그들의 상처가 향유고래에서 채취하는 용현 향처럼 아픔들이 향기가 되어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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