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 안내 멘트, 밥솥 취사 멘트, 엘리베이터 멘트는 왜 다 여성 목소리일까? 그 옛날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 안내양도, 엘리베이터 걸도, 콜센터 직원도 대부분 여성이다.
짐작컨대 그건 그냥 단순히 여자가 하는 게 나으니까, 이런 간단한 이유가 아니다. 더 구체적이고 불쾌하다.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나라를 막론하고 웬만한 안내 목소리는 거의 여성이다.
나는 콜센터 직원이 남자인 경우를 몇 년 전에 딱 한번 본 적 있다. 아니, 들은 적 있다. 그 직원의 목소리는 변성기가 오지 않은 것처럼 가느다랗고 몹시 나긋나긋했다. 원래 본인 목소리는 아닌 듯했다. 무엇이 그의 목소리를 그렇게 변화시켰을까?
로봇도 성별이 없거나, 있으면 무조건 여자(어설픈 화장을 해줘 가면서). 치어리더? 여자. 레이싱걸? 이름부터 여자. 소주 모델? 여자. 마트 판촉? 여자. 죄다 여잔데 그게 그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나라의 노력으로는 뵈지 않는다. 남자 로봇도 있다든가, 요새는 소주 모델 남자도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내 말은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직업 비하도 아니다. 나도 마트 판촉 일을 여러 번 했다.
솔직히 이 모든 것은,
도대체 언제 살아나는지 모르겠는데,
살린다고 해서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도 않으면서,
건드리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고,
맨날 죽을 위기에 처하기만 하는 주제에 당최 본 적도 느낀 적도 없는
남자의 기氣를 죽이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보인다.
'이번 정류장은 ㅇㅇ역입니다' 이 멘트가 남성이면 그만 죽어버릴 정도의 기를 가졌다면 그건 그냥 살려도 별 볼 일 없는 것이다. 본인이 목적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을 텐데, 상담받는 목소리가 굵은 남자 목소리라는 이유로 할 말도 못 한다면 이 험한 세상 사는 데 제법 곤란할지도 모른다.
지금 일하는 회사 1층 출입구에는 안내원이 항상 자리하고 있는데, 정장을 입은 남성이다. 안내원이 매일 아침 인사를 하면 나도 인사를 한다. 들어보니 목소리도 별로 인위적인 편이 아니다. 자꾸 보니까 익숙해진다. 고로 남자여도 큰 일 안 난다. 별 일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자꾸 바뀌어야 한다. 여성이 안내원 대신 임원이 되는 세상이어야 한다. 여성 버스 기사가 더 많아지고, 여성이 밥솥 만드는 사람이 되어 남자 목소리를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남자는 죽었다 깨도 거기에 남자 목소리 안 넣을 거거든.
정말 슬픈 건 회사에 중년 여성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다니는 직장이든, 주변이든. 기혼 여부 상관없이 그냥 없다. 사오십대 여성이 없다. 출퇴근길 그 사람 많은 강남 일대를 돌아다녀도 직장인 중장년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청소부로 나타난다. 마트에 가면 나타난다. 집에 가면 나타난다.
직업의 귀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은 중장년이 되면 본부장, 이사, 사장으로 올라가는데 그 자리에 여자는 없는 것. 있으면 그냥 승진한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사모님인 것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요새는 안 그런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누가 아예 없진 않은 거 몰라서 이러냐고. 근데 꼭 그러잖아, 뒤에서. 독한 년이라고. 당차고 야무진데 지독하다고. 이 세 수식어는 남자에게 붙지 않는다. 당찬 남자, 야무진 남자, 독한 남자. 왜 어색한 지 아는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거든. 좀만 잘해도 앞서 서술한 그 기氣를 세워주며 비행기 맘껏 태우거든. 여자는 다르다. 독한 년 소리 들어가며 최대치로 잘해야만 겨우 인정받는다. 그나마도 겉모습이 지들 맘에 들어야 통과다. 화장을 덧칠한 마네킹 로봇처럼.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 사고방식은 이렇게 흘러간다. 일 다니다가, 결혼을 하면, 애를 낳겠지. 그러면 회사를 나가야겠지. 당분간 이직도 못할 테니 경력이 단절되겠지. 욕이 절로 나온다. 이러려고 피땀 흘려 자소서 쓰고 면접 본 것이 아니다. 내 소중한 경력이 그런 이유로 끊기는 거 용납 못한다. 대부분의 직장인 여성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근데 나는 독한 년 소리는 듣기 싫다. 누가 듣고 싶어 해? 난 싫어. 내가 남자면 안 그랬을 거잖아. 그냥 대단하다고 해. 그 말하는 것조차 기가 죽는 일이라면 그 기는 그냥 없는 게 낫다.
글을 쓸수록 화난다. 당장 해결할 수 없으니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도랑에 빠져서 바퀴가 헛도는 기분이다. 대체로 드는 기분은 무력감이다. 이래서 여자는 화가 내재되어 있다. 남자가 유별나게 대가리 꽃밭이라는 뜻은 아니다. 제 대가리도 꽃밭입니다. 이따금 불이 붙긴 하지만.
내 글이 다른 의미로 와전되지 않기를 바란다. 직업 비하도 아니고 뭘 당장 그만두라든가, 바꾸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하기 싫으니까 너네 남자가 해, 이런 가벼운 말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단히 무거운 뜻을 담은 것도 아니다.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승진에 목숨 거는 삶을 선택하면 이상하게 보는 것. 미디어에서 요리 잘하는 훈훈한 남자는 'ㅇ셰프'라는 수식이 붙으면서 요리 잘하는 훈훈한 여자는 '주부' 혹은 'ㅇ장금'만 붙여대는 것. 실제로 셰프 비율은 남자가 더 높으면서 부엌일은 죄다 여자의 몫으로 돌려버리는 결혼 문화. 집안일은 같이 하는 거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도 남자에게만 집안일을 할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 그나마도 남자에게 뭘 맡기면 안 된다면서,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는 식으로 어엿한 성인 남성을 미취학 아동 혹은 짐승으로 비유해가며 골치 아픈 일은 선뜻 쥐여주지 않는 것. 그래 놓고 급여는 더 챙겨주는 것. 임원급으로 기꺼이 승진시키는 것. 모든 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제발 이 글이 구시대적 생각이길 바라기도 한다. 이젠 와전되어도 상관없다. 요새 누가 그래 ㅋㅋ 글쓴이 아무것도 모른다 진짜, 이러면서 댓글이든 뭐든 친절히 알려주면 좋겠다. 내 생각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또한 모순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주장이 틀리기를 바라겠냐고. 하지만 난 내 말이 틀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좀 덜 억울하니까. 그리고 내 목표를 더 높게 세울 수 있으니까. 성별과 결혼을 이유로 단절되지 않을 경력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