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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산부 짜리로는 마감 칫수가 빠져”

자와 치, 잇승과 니승이 들려준 제재소의 언어학

by 우드코디BJ
P20250918_133820177_44F2C752-8612-4BE7-A114-0FAEB6B63C8F.jpg 목재숙성창고에 보관 중인 더글러스퍼(Douglas Fir) 건조목 판재


"이거 피트(Feet) 규격인가요?"


목재 창고에서 자재를 고르던 손님의 물음이었다. 철제 랙에는 '10자 × 4.0치 × 1.3치'라는 표기가 붙어 있다.


"10자짜리니까 대략 3미터쯤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짧은 대화 속에는 한 시대를 관통하는 복잡한 세계가 숨어 있다. 우리는 미터법 시대에 살고 있지만, 현장은 여전히 '자(尺)'와 '치(寸)'를 사용한다. 이 오래된 규격에는 세대를 거쳐 이어진 관습과,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된 역사적 유산이 함께 남아 있다.


잇승·니승, 현장의 언어


처음 목재업계 실무를 배울 때가 떠오른다. 평생 미터법에 익숙했던 내게 '자(尺)', '치(寸)'는 물론이고 '잇승(1치, 30mm)', '니승(2치, 60mm)' 같은 일본식 호칭들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계산이 바로 되지 않아, 결국 줄자로 직접 재어봐야 감이 왔다.


현장에선 1자(尺) 300mm, 1치(寸) 30mm로 통일해 계산한다. 여기에 0.1치(3mm)를 나타내는 '부(分)'가 더해져 환산은 단순하지만, 현장에서는 이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언어였다.


잇승(1.0치), 니승(2.0치), 승고(1.5치, 45mm) 같은 표현이 이어져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더 세밀하게는 승(寸), 부(分), 링(厘)으로 나뉘어 0.3mm까지 표현할 수 있다.


KakaoTalk_20250926_154028034.jpg 주문장(Product Order)에서 소재 규격은 '척관법'으로 표시되고, 마감 규격은 '미터법'으로 표기한다


척관법의 역사


척관법은 본래 중국에서 비롯돼 한자문화권 전역에 퍼진 도량형 체계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건축과 목재에 활용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일본식 도량형이 유입됐고, 일제강점기에는 메이지 시대에 표준화된 척관법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법정 단위'로 지정됐다. 해방 후에도 이 체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적산(敵産, 일본인 소유 재산) 제재소의 설비와 도면은 물론 숙련공들의 언어까지 해방 후 그대로 남았기 때문이다.


1961년 정부가 미터법을 공식 도입하며 척관법 사용을 금지했지만, 목재업계에서는 이 오래된 언어가 살아남았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척관법은 축적된 경험과 구전 문화 속에서 오히려 가장 분명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기능한다.


P20250918_161318729_4725D27E-1938-47F3-980B-18C4444C665A.jpg 북미 지역에서는 '야드파운드법' 규격으로 목재를 생산한다


수입 목재의 규격 언어


목재의 언어적 복잡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북미산 목재는 완전히 다른 규격 체계를 따른다. 월넛, 오크, 체리 같은 수입 목재가 들어오면, '길이는 피트(Feet)', '폭과 두께는 인치(Inch)'로 표기한다.


특히 두께는 '쿼터(quarters)'라는 독특한 단위로 표시한다. 1/4인치를 기준으로, 4/4는 1인치(25.4mm), 6/4는 1.5인치(38.1mm)를 뜻한다. 마치 피자를 4등분 하듯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같은 나무를 다루는 일이지만, 그곳에 스민 역사와 문화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는 가지처럼 갈라진다.


KakaoTalk_20250929_093124081.jpg 현장 기술자가 주문장을 보면서 작업 순서를 가늠하고 있다


현장에 배인 척관법


'왜 이렇게 낯선 단위를 계속 쓸까?' 처음에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매일 잇승, 승산부(1.3치, 약 39mm)를 쓰다 보니 어느새 그 언어에 익숙해진 나를 발견했다. 혼자 바꿀 수 없는, 오랫동안 굳어진 관습이었다.


답은 현장에 있었다. 주문장을 든 30년 경력의 베테랑들에게 척관법은 몸에 새겨진 감각이다.


"승산부(1.3치) 짜리로는 마감 치수가 빠져. 차라리 승고(1.5치)를 두 쪽 내는 게 낫지."


숙련공들의 짧은 대화 속에는 수십 년의 경험이 녹아 있다. 이들에게 새로운 단위를 익히게 하는 건 단순히 계산법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형성된 감각과 체계를 흔드는 일이다.


P20250918_132951383_86B79339-58F4-4908-9F40-36F8EB4224D0.jpg 척관법 단위를 익히는 건 제재소 근무자에게 일종의 통과의례다


시간이 남긴 언어의 무게


척관법이 남아 있는 이유는 역사적 관성만이 아니다. 지금도 신입 사원의 업무 일지에는 '규격 발음표'가 붙어 있다. 언뜻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그것은 시간이 쌓아온 무게를 인정하는 방식이다.


척관법은 제재소의 언어다. 수백 년간 다듬어진 살아 있는 말이다. 일제 잔재라는 비판도,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지적도 있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가장 빠르고 분명한 소통 수단이다.


그래서 질문은 바뀌었다. '왜 이런 단위를 쓰느냐'에서 '이 오래된 언어를 이해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로.


"이건 척관법 규격이에요. 상담지에는 센치미터로 풀어서 적어드릴게요."


입사 후 시간이 흘러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제재소의 일원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결국 그 언어로 살아온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서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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