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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인 이세린 Oct 18. 2021

평강공주 콤플렉스

오늘도 난 헤어질 팔자




썸은 썸이고, 연애는 연애다

 - 으이구, 박복한 년. 그렇게 쫓기듯이 급하게 연애하지 말라니깐.


  라고 했다, 땡초가. 넌 너무 급하단다. 부정할 수가 없다.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랑꾼이라 금방 사랑에 빠진다. 도쿄 금사빠. 친구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다. 지랄맞게 찰떡이고 난리야. 심지어 성격도 급해서, 연애를 방학 숙제나 깨야하는 퀘스트처럼, 꼬셔내고 사귀어내는 게 최종 목적이자 궁극의 목표였던 시절이 있었다. 썸의 결말은 연애여야 했고, 연애의 끝은 결혼 그 비스무리한 거여야만 했다. 개학이 내일인데 빨리 숙제해야 해! 레벨업 할려면 밤새서 이 퀘스트 깨야된다니깐? 지겹게 반복하다 보니 내가 이 짓을 대체 왜 하고 있는 건지, 이젠 만사 귀찮다. 썸의 끝은 끝!이고, 연애의 끝도 끝!이다. 땡땡땡.



사실은, 관상가가 되고 싶다

  아니 보통, 뭔갈 하면 할수록 늘어야 되는  아닌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님 내가 소질이 없는 건가. 당최 연애란  거듭하면 할수록  모르겠다. 기술자가 되고 싶다. 어딜 가도 먹고는 살고, 누굴 만나도 어렵지 않게 사랑은 하고 살지 않겠나. 그러다 오늘 우연히 브런치에서 어떤 글을 읽었다. ‘연애의 기술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힘든 상황을 하나씩 해결하는 방법을 익히는  연애를 하는 과정이다’. 나루호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진득하지 못해서, 차라리 기술을 익히는  빠를 거란 생각을 한다. 요령을 익히는 , 그게  연애의 첩경이 아닐까 하고.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땐, 지금 막 헤어진 사람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사람을 택했다. 그 시작은 나다. 나의 단점을 메꿔줄 수 있는 사람. 마음에 털이 나고 성격에 모가 나서, 착한 초식남을 만났다. 언젠가 그 배려가 숨 막히게 답답해지면 박력 있는 육식남을 만났고. 무뚝뚝한 사람과 헤어지면, 용케도 다정한 사람을 찾아 만났다. 빠알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기차는 빠르고 비행기는 높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말이다. 그 중에 그나마 착한 놈을 만나고 싶다가도, 솔직히 말하면 이젠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 나도 모르게 됐다. 따뜻한 눈빛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난 과연 어떤 눈빛을 가졌을까 거울을 들여다본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머리가 크고 건방져져서 남자 보는 눈이 생겼다고 큰소리치곤 하는데, 사실 개뻥이다. 나란 인간은 크게 변하지 않고, 여전히 찌질한 온달들만 만난다. 콩깍지가 씌이면 주변의 만류에도 들어먹질 않는다. 결국은 나 하고 싶은 대로 썸을 타고, 연애를 한다. 그래서 결혼만큼은 내 결정의 책임을 엄마에게 슬쩍 토스해본다. 엄마가 반대하는 사람은 만나지 말자, 하고. 연대책임이랄까. 막상 그때가 되면 내가 무슨 선택을 할지 장담할 순 없지만, 딸의 불행으로 엄마를 슬프게 하고 싶지는 않다. 엄마의 연륜쯤 되면, 관상을 볼 수 있을까? 뭔가 쎄하다 싶으면 잽싸게 발을 빼야 하는데,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겠다. 결국 끝까지 가고 나서야 깨닫는다. 아, 이세린이 또.



평강공주 콤플렉스

  연민과 사랑을 헷갈리지 말자. 매번 다짐하는데, 오늘도 실패한다. 아마 내일도 그렇겠지. ‘사랑이 깊어지면 연민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시작은 안 보면 못 견디는 애틋함으로 하고 싶다’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정말로 그렇다. 비록 내 이상형은 엉망진창이 됐어도, 내가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진 너무나도 잘 알게 됐다. 여기,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온달들이 있다. 돈이 없거나 빽이 없거나. 하여튼 뭔가 없다. 가오는 있다. 내 애정의 시작은 항상 연민인 걸까. 나도 결핍한 주제에 제 앞가림이나 잘할 것이지 누가 누굴 케어 한단 건지 모르겠다. 나야말로 돈도 빽도 없이 가진 거라곤 사랑뿐이 없는데. 이런 내가 평강공주가 될 리 만무하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여전히 찌질한 남자에게 연애를 거는 나는 그냥 향단이다.


  이쯤 되면, 내가 만난 사람이 그렇게 별로였나? 사실은 멀쩡한 사람인데 날 만나서 찌질해지는거 아니야? 진짜 나한테 문제가 있나?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본다. 근데 이건 너무 슬픈 일이다. 방금 막 헤어졌는데,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하면 나는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인생의 선배들이 말하길,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쳇. ‘좋은 사람’ 그게 뭔지 가르쳐 주지도 않고, 자기네 사랑 얘기 아니라고 이렇게나 막연한 얘기를 엄청 쉽게 한다. 그러려면 일단, 좋은 사람이란 과연 무엇인가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철학적 고찰을 통해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나면, 남은 건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이 되는지 방법론적인 접근이다. 그렇게 ‘좋은 사람’ 흉내를 조금 내봤는데, 역시 연기력이 달린다. 시민인 척해야 하는 마피안데, 자꾸 들킨다. 어휴. 만사 귀찮다. 나는 그냥 나대로 살란다. 다 내 팔자고, 샛복이고, 그래도 나는 꽤 매력적인 향단이니까.





이 사람은 이래서, 저 사람은 저래서 하며
모두 내 마음에서 떠나보냈는데
이젠 이 곳에 나 홀로 남았네
<그때 왜>, 김남기 詩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과 사랑을 하는 것, 사람을 아는 것, 사랑을 아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타인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난 항상 그 세계에 겁도 없이 발을 들여놓고, 멋대로 휘저어 놓고 나선 발 뺄 때가 돼서야 거짓말처럼 용기가 사라진다. 상처 받을 것이 두려워 잊자, 신경 끄자, 그만하자 하니 사실은 스스로에게 아무도 사랑하지 말라 얘기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나 같은 사랑꾼에겐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아닌가? 난 사랑 못 끊는다. 차라리 개가 똥을 끊지.


신주쿠 환경 미화원

  새로 생긴 별명이다. 이 동네 하자 있는 사람들은 다 만난다나 뭐라나. 아는 언니랑 우스갯소리로 한 소리지만, 남자복 없단 얘길 이렇게 또 듣고야 만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형태의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던가, 툭하면 죽겠다 소리하는 멘헤라*를 만났다던가,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던가 그런 건 아니다. 쓰고보니 지극히 평범하다. 만날 땐 다들 ‘괜찮은’ 사람이었고, 멀쩡했다. 적어도 내 눈엔 그랬다. 단지 헤어짐 후에,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하는 자조적인 한탄이랄까. 지나간 모든 존재를 후회 없이 사랑했지만, 새하얗게 불태운 나에겐 무엇이 남았는가. 하다못해 이젠 남자 보는 눈이라도 장착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박복한 팔자에 대한 신세 한탄이고, 무심한 하늘이 원망스러워 쓰는 ‘굳이 궁금하지 않은’ 티엠아이, 내 지나간 사랑 얘기다. 이렇게 썰 풀다 보면, 괜찮은 사람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해 보면서.


  이미 흘러가버린 사랑에 대하여 쓰자고 일은 벌였는데, 고백하자면, 실은 내가 엄청난 찐따인 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다. 주변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인데도 말이다. 구남친 뒷담화 하려다가 내가 다 까발려지게 생겼다. 아니 뭐, 남몰래 날 짝사랑하는 누군가라든가, 미래의 썸남이라든가, 어딘가엔 있을지도 모르잖아? 혹시라도 이거 보고 도망가면 어떡하냐며 발을 동동댄다. 구남친한테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것보다 이러다 진짜 아무도 못 만나면 어떡하나 이게 제일 걱정이다. 그래, 갈 테면 가라. 최대한 멀리. 난 마피아지만 열심히 좋은 시민인 척을 해보자.






* ‘체는 동정과 사랑을 구분했다. 사랑이 깊어지면 연민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시작은 안 보면 못 견디는 애틋함으로 하고 싶다.’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2021』)  

 : 요즘 읽고 있는 단편집인데, 짧지만 좋은 여운이 남는다. 나도 체처럼 동정과 사랑을 구분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마침 다가온 구절. 아, 체는 등장인물 이름.


* 멘헤라(メンヘラ) : 멘탈헬스에 ‘-러’를 붙여 줄인 말로, 정신 질환이나 심신 장애가 있는 사람을 뜻한다. 의외로 무겁지 않게, 쉽게 쓰이는 것 같다. 난 아직까지 만나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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