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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재 Dec 08. 2024

질문이 위험한 사회에서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인지 아이가 물었다 

12월이다. 모든 것이 마무리를 향해 가는 달이다. 중학생인 딸아이 기말고사가 코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교과서에서 봤던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동안 '부모 되는 법'을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아 부모노릇이 이렇게 어려운가 싶었다. 그게 아니었다. 폭력과 억압, 상식이 붕괴된 시대에 대해 분명히 배웠지만, 그 일들이 내 앞에 현실로 다가오자 시험 당일 수험표를 두고 온 수험생처럼 머리가 하얗게 될 뿐이다.  


엄마, 이것 좀 봐. 이게 이번 시험 범위에 들어가거든? 정의로운 국가. 


아이가 내민 교과서를 살펴본다. <도덕>이다. 법과 도덕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강제성의 여부다. 법도 도덕도 사회적 약속이나 도덕은 공동체 구성원의 양심과 가치관, 선한 의지를 믿고 의지한다. 아이는 도덕과목에서 정의로운 국가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단원의 성취목표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1.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인지 이해하고 
2. 시민이 갖추어야 할 자질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가운데 
3. 준법 의식을 길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다. 


아름답다. 이 구절들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말들이었나. 지켜져야 할 단단함이 있고 지켜지지 않았기에 공허하다. 천천히 교과서를 살펴보니 정의로운 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크게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보장, 공정한 사회제도 확립과 유지, 그리고 보편적 가치 지향이다. 민주주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선출된 대통령이 성문화된 절차를 모조리 무시하고 헌법 기관을 장악하려 했으며 국민에게 총구를 돌렸다는 사실이 아이의 마음을 산산조각 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 사랑하는 내 아이의 마음이 어디에 금이 갔는지, 얼마나 작게 부스러졌는지 눈이 어두운 어미는 알 수 없어 애가 탄다. 


제2 비상계엄이 선포되거나 전쟁이 일어나면 아빠도 전쟁에 끌려나가야 하느냐고 묻는 아이에게서 가족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불안과 애처로움이 뚝뚝 떨어진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교과서에서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보완해야 할 제도에 대해 수행평가 과제를 고민한다. 정의로운 국가에서 추구해야 할 상식과 보편성을 고민한다. 그러니 '해제된 계엄도 다시 보자'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공익광고 문구처럼 여겨지면 안 될 문구다. 대통령은 비상계엄령 선포와 1분 30초짜리 대국민 사과 쇼츠로 시민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아이는 국회의원들의 투표 불참으로 인한 탄핵 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아예 성립되지 않았다는 뉴스를 보며 조용히 말한다.  


투표가 국민의 권리라면서. 젊은 애들이 개념이 없어서 투표를 안 한다면서. 왜 안 해. 자기들이 개인이야? 국회의원이면 국민의 뜻을 대신하는 사람들 아니야? 


초등학교 4학년 사회과에서 아이들은 주민자치를 배우기 시작한다. 내가 사는 고장, 지역, 우리나라, 세계로 물리적 범위를 확장하고 그 안에서 역사를 알아간다. 그렇게 물리적 시공간을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약속들을 만들어냈는지 이어받는다. 개인 맞춤형 교육과 인공지능의 시대, 창의력과 공감력, 협동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시대이다.  2024년 지금의 아이들은 권력을 가진 이가 개인의 취향대로 해석한 그릇된 판단을 바탕으로, 학연에 기댄 일그러진 협동을 통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불법이 어떤 보호를 받게 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보게 되었다.  


당신들은 아이의 질문에 뭐라 답할 것인가. 그런 질문을 하지 말고 그저 시키는 공부나 잘하라고 다그칠 것인가. 시대의 정의는 시민의 몫이니 잘 배워 배운대로 실천하라 할 것인가. 삶에서 피워낼 수 없는 가짜 씨앗만을 머리로 외워 입시 기계로 만드는 것이 이 나라 교육인가. 가르친 대로 행동하지 않는 기성세대를 보며 오지선다 시험지에서 정답을 골라 마킹하는 아이들이 어떤 마음일지 생각하지 않는가. 시민은 스스로 양심과 사회의 공동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라 가르쳤다면, 아이들이 어른들이 만들어 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현실을 살기를 원한다면 멈춰야 한다. 청년들은 이미 희망을 잃고 무기력을 호소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상처 입은 청소년들이 사회에 대한 불신과 냉소로 청년기에 진입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사회적 약속, 정의, 그딴 것들 지켜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여기지 않도록 나서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아는 대로, 배운 대로 양심에 따라 살기를 바라는가. '당신들의 우리'에 갇히지 말고 당신들이 딛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우리'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아직 기회가 남아있을지 모른다. 부디 당신들이 저지른 일을 이 세상 부모들이 수습하고 얼버무리게 만들지 말라. 당신들이 아름답고 정의로운 언어로 치장하여 구호로 외치던 '그 대한민국'을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호기심을 가지고 남과 다른 시선에서 질문하는 창의적 인재상이 필요하다고 말해오지 않았던가. 이 일이 잘못되지 않았느냐 묻는 질문은 위험하다고 둘러대는 당신들의 이중성을 내려놓으라. 이미 이 나라의 국민이며 시민인 미래 세대의 미래는 오늘부터이다. 그러니 당신들이 산산조각 낸 그 미래를 당신들 손으로 돌려놓으라. 추위에 떨며 원칙을 지키라 외치는 동료 시민들의 모습을 촛불삼아, 사금파리 한 조각의 희망을 찾는 일을 아이들의 몫으로만 떠넘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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